"영원히 세상의 진면목 볼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입력 2017-04-03 08:00  

"영원히 세상의 진면목 볼 수 없는 인간의 숙명"

구효서 아홉 번째 소설집 '아닌 계절'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소설가 구효서(60)는 문단의 마라토너이자 유목민이다. 1987년 등단 이래 30년 동안 장편 20편, 소설집 8권을 부지런히 엮어냈다. 죽음·종교 같은 관념의 세계부터 도회적 정서까지 주로 하는 이야기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는 환갑을 앞두고 생애 첫 멜로소설을 썼다.

새로운 시도는 아홉 번째 소설집 '아닌 계절'(문학동네)에서 좀더 근본적인 지점을 향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소설이 언어로 그려온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감각을 의심한다.

'세한도'에 그려진 세계는 희미하고 모호하며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다. 선짓국집에서 '디젤 냄새'를 맡는 여자는 선짓국 대신 콩나물해장국을 먹는다. 팔뚝에 글씨를 새기던 선짓국집 남자가 어느 날 실종되고 여자는 경찰 조사를 받지만, 남자의 행방을 알려줄 특별한 단서는 없다.

어린왕자, 과개주다, 협향촌, 쟁선포식, 부부동산투, 선봉투쟁주거, 검은 해골…작가가 세밀하게 묘사하는 동네 곳곳의 낙서는 의미 없이 이미지로만 떠돈다. "바람이 불고 추웠다. 몹시 추웠다. 세상에 분명한 건 그것뿐이었다."

감각체계에 대한 회의는 '12월12일―이상에게'에서 두드러진다. 이응은 일삼아 사진을 찍지만, 재현된 세계에는 관심없다는 듯 필름을 현상하지 않고 옹기에 필름을 던져넣는다. 시장통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산 카메라에는 '12월12일'이라고 적힌 오래된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쪽지 뒷면에는 '1936년'이라고 쓰였다. 사진관 주인은 카메라를 사들인 날짜일 거라고 했다.

이응이 카메라를 팔러 간 사진관에서 주인은 종이쪽지에 '12월12일', '1936년'이라고 적는다. 이응에게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순환하거나 반복된다. "세상은 오고가고 겹치며 어딘가로 흘러가거나, 앞뒤 없는 거대한 허공 한가운데 둥둥 떠 있거나 했다." '12월12일'은 이상(1910∼1937)이 1930년 발표한 동명 소설에서 주인공이 떠나고, 돌아오고, 죽는 때로 반복되는 날짜이기도 하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등장인물은 대개 '남자' 혹은 '여자'이거나 '파'와 '하'처럼 그저 기표에 불과하다. 작가는 인물의 이름과 과거가 가져다주는 선입견을 배제한다. 수록작 여덟 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계절로 나뉘는데 표제에서 보듯 말 그대로 시간적 배경일 뿐 이야기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소설에서 분명한 것은 겨울이면 "몹시 춥다는 것" 또는 "8월의 정오는 뜨겁다는 것" 정도다. 봄은 "복수초 말고 그 어떤 것도 없는 세상"일 뿐이다.

책에는 해설 대신 화가 안경수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실렸다. 감각에 대한 작가의 회의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처럼 생기지 않았겠지요. 우리는 고작 가시와 가청 범위 안의 것만 보고 들으니까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기에는 우리의 오관은 터무니없이 제한적이고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원히 세상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숙명이겠지요." 288쪽. 1만2천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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