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여느 땅과 같지만,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곳.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인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은 그 자체가 한반도 최남단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이곳엔 지금 봄이 한창이다. 뭍은 연초록으로 물들었고, 바다는 짙고 푸르다. 백일도, 흑일도, 보길도, 노화도, 장구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다도해 풍경은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평안함을 깃들게 하고, 바다와 섬들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는 신비감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더는 육지를 통해 내려갈 수 없는 땅끝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땅의 시작, 희망의 땅끝’이라는 표지석은 ‘끝이 곧 시작’임을 일깨운다. 우리 땅은 해남 땅끝에서 끝났지만, 또 이곳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는 끝을 보기 위해, 누군가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국토순례의 시발지인 땅끝마을을 찾는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1천리, 서울에서 함북 온성까지를 2천리로 보고 우리나라를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했다.
한반도 땅끝에 세워놓은 사자봉 아래 위치한 땅끝마을의 정식 지명은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다.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라는 뜻의 ‘갈수리’(渴水里)였다가 물이 귀한 바닷가 마을에 좋지 않은 이름이라 하여 ‘갈두리’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오지마을이었던 땅끝마을에 1987년 땅끝탑이 세워지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관광지’이자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누리꾼이 뽑은 가장 가 보고 싶은 곳’으로 선정됐다. ‘해남관광 1번지’인 땅끝마을에는 식당과 모텔, 펜션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곳 선착장을 치면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인 보길도로 갈 수 있다.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사자봉 꼭대기에는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땅끝전망대가 우뚝하다. 땅끝전망대는 모노레일을 타고 옥빛 바다를 굽어보며 수월하게 오를 수 있고, 느림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옛길을 걷거나 갈두산 중턱에 자리 잡은 주차장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김인호 문화관광해설사는 “대부분 관광객은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올라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고, 산책로를 따라 땅끝탑에 들른 뒤 마을로 내려온다”며 “땅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되새기지 않으면 여느 해안가 마을과 특별히 달리 보일 게 없다”고 말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이 40m의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남해의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땅끝마을과 선착장, 백일도와 흑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노화도·보길도·완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잡힌다. 사자봉은 날씨가 맑은 날 멀리 제주도의 한라산도 볼 수 있다고 해서 ‘망탐봉’(望耽峰)’으로 불렸다.
전망대 서쪽, 서해와 남해 물이 만나는 댈기미 앞바다의 전복 양식장은 마치 바다에 펼쳐놓은 바둑판 같다. 그 너머로 양도와 물살이 거센 갈산당 앞바다가 보인다. 뱃사람들은 제(祭)를 지내고서야 이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막돌을 쌓아 복원한 봉수대를 둘러보고 땅끝탑으로 향한다. 100여 개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시(詩)가 있는 시비공원과 땅끝탑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김인호 해설사는 “많은 사람이 몰라서 시비공원은 가지 않는다”며 오세영의 시 ‘땅끝마을에 서서’를 읊어준다. “누가 일러/ 땅끝 마을이라 했던가./ 끝의 끝은 다시/시작인 것을 … / 내 오늘 땅끝 벼랑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노니/ 천지의 시작이 여기 있구나./ 삶의 덧없음을/ 한탄치 말진저/ 낳고 죽음이 또한 이 같지 않던가./ 내 죽으면/ 한 그루 푸른 소나무로 다시 태어나/ 땅끝 벼랑을 홀로 지키는 파수꾼이 되리라.”
시비 공원에는 오세영 시비 외에 고은·김지하 ·송수권·황동규·고정희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시비가 숲 속에 점점이 박혀 있다. 눈앞에 바다를 두고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주위로는 동백나무와 남해안의 키 낮은 원시림이 빽빽하다. 나무계단 그 끝에 돛을 펼쳐놓은 것 같은 삼각뿔 모양의 땅끝탑이 서 있다. 북위 34도 17분 21초, 걸어서 더 나아갈 곳이 없는 곳이다. 탑에는 “이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땅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라고 새겨져 있다.
땅끝탑 바로 앞,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에 서면 가슴이 확 트인다. 전망대 바닥에는 ‘희망의 시작’이라고 적혀있다. 사람들은 영화 ‘타이타닉’의 뱃머리에 올라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케이트 윈즐릿처럼 사랑을 약속하기도 하고 소망을 기원하기도 한다. 이곳에서의 일출은 희망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준다.
주역에서도 종즉유시(終卽有始)라 했던가, 끝이 있어야 새롭게 시작하는 법. 땅끝탑을 등지고 바다를 낀 산책로를 걷는다. 병풍바위, 문바위, 사재끝샘을 지나면 여객선과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이다. 선착장 앞에는 형제바위와 소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내린 맴섬이 마주 보고 있다. 일출 명소인 맴섬은 두 개의 바위섬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풍광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이런 광경은 1년에 단 두 번(2월 중순과 10월 중순)이어서 더 강렬하다.
땅끝마을은 ‘생태문화탐방로 땅끝길’과 ‘땅끝에서 서울을 잇는 삼남길’의 시발점이다. 땅끝길은 총 43㎞로 땅끝바닷길, 점재길, 묵동갯길, 쇠노재길 등 4코스의 테마로 나뉜다. 삼남길의 1구간인 ‘처음길’은 바다와 산을 두루 즐길 수 있는 통호리까지 17㎞의 코스로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가 이곳이다.
해남은 어디를 가도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풍경을 걸어 놓았다. 땅끝마을에서 사구리 해수욕장과 땅끝조각공원으로 가는 길은 ‘경관이 좋은 길’로 곳곳에 덱 전망대와 쉼터가 있다. 땅끝마을에서 7km 정도 떨어진 땅끝조각공원에는 해남의 산천과 풍광을 새긴 작품 26점이 설치돼 있다. 조각공원 꼭대기에 서면 대리석 조각 너머로 땅끝마을과 땅끝전망대, 그리고 다도해 풍광을 한눈에 품을 수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4월호 [커버스토리]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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