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북·소관계 긴밀화 틈타 한중·북미 접근방안 논의
홍콩 무대 韓총영사관-신화통신 막후 채널 가동도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지성림 기자 =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미수교 상태였던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모란구상'이라는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군산항 채널'이라는 비공식 소통로를 가동하는 등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했던 사실이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 11일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한반도 긴장 완화 방안으로 한국과 중국·소련, 북한과 미국·일본이 서로 관계 정상화를 이루는 '교차수교'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대(對)중국 접근에 많은 외교력을 쏟았다.
소련과 북한의 관계 긴밀화를 활용해 중국을 견인하는 방안이 한미 사이에 논의되는가 하면, 중국 관영언론인 신화통신이 한·중의 비공식 채널 역할을 하는 등 국교가 없는 양국 사이에서 다양한 '우회로' 탐색이 이뤄졌던 상황이 외교문서에 생생히 나타나 있다.
◇ 한미, 對중국 접근 '모란구상' 협의…연합훈련 조정 놓고 견해차도
1980년대 중반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각종 신무기를 도입하는 등 북·소 관계가 부쩍 긴밀해지자 중국은 이에 우려를 드러내며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높이려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과 미국은 이런 상황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란' 구상이라는 이름 아래 1986년 초부터 협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6년 5월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외무부가 작성한 '한미 외무장관 회담 별도 자료'의 '모란' 구상 협의 경과에 따르면 논의의 발단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1985년 11월 중국 방문이었다.
중국 측이 북한과 소련의 관계에 우려를 보이며 '미국이 대북관계에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경우 중국도 대(對)한국 (관계) 관련 문제를 더 검토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리처드 워커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키신저의 방중 결과를 1986년 1월 한국에 전달하면서 중국의 태도 변화를 활용할 방안에 대해 협의가 시작됐다. 한국은 그해 3월 20일 '모란'으로 명명한 구상을 미국 측에 전달하며 견해를 타진했다.
이 자료에는 '모란' 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다만 이상옥 당시 외무차관과 데이비드 램버트슨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공사가 북한 학자의 미국 입국, 사교 행사에서 미·북 외교관 접촉 등 '작은 조치'부터 생각해 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한국 측은 중국과 직접 교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언급이 있다.
이런 점에서 '모란' 구상은 북한을 의식하는 중국이 한국과의 교류에 응하게 하도록 미국이 북한에 다소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논의 초기 미국이 '북한의 군사활동 축소를 전제로 한 한미 팀스피릿 훈련 변경 가능성'을 검토하자는 제의(1986년 1월 21일)를 해 한국이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6년 1월 23일 방한 중이던 윌리엄 셔먼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와 이원경 당시 외무부 장관의 '면담요록'을 보면 이 장관은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강한 신호를 보내야 할 것"이라며 팀스피릿 훈련 조정이 불가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셔먼 부차관보는 "이제는 보다 광범위한 선택을 두고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할 때"라며 한국에 융통성 있는 태도를 독려했다.
셔먼 부차관보는 워커 대사에게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국의 제의를 전하도록 지시(훈령)을 내렸는데 접견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미국 측이 다소 '당혹'(perplexed)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홍콩주재 韓총영사관·신화통신 홍콩지사 '군산항 채널' 가동
공식 외교채널이 없던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과 중국 신화통신 홍콩지사가 이른바 '군산항 채널'로 불리며 의사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 상황도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드러났다.
군산항 채널의 물꼬를 튼 것은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이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표류한 사건이었다. 중국 측의 요청으로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와 신화통신 홍콩지사 외사부장이 접촉을 한 것이다. 이후 양측의 잦은 만남은 양국 간 상시접촉 채널로 발전했다.
양측은 여러 차례 오찬과 만찬을 하며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자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며 관계를 돈독히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예로 1986년 외교문서를 보면 그해 2월 말 열린 만찬에서 신화통신 측은 우리 총영사관을 통해 당시 중국 공군 조종사의 망명 사건과 관련한 최종 결정을 1∼2개월 연기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특히 양국은 이 채널을 통해 갈등과 오해를 푸는 데 주력했다.
1986년 11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설이 돌연 제기되자 김재춘 당시 한국 총영사는 12월 초 신화통신 측과의 오찬에서 "한국이 발설한 것으로 일부 중국 지도층이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 소문의 출처는 일본이며, 한국 정부에서는 국민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그런 소문이 있었음을 알린 것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1986년 9월 중국 동북지방인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자,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배경을 탐문하기도 했다. 홍콩을 통한 한·중 접촉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의 광둥 대신 선양에 영사관을 설치했다는 점에서였다.
◇ 韓, 미중수교 이후 외교공관 통해 對中 '탐색전'
미중 수교(1979년)의 여파가 남아있던 전두환 정권 초반, 정부가 당시 외교관계가 없던 중국을 상대로 '탐색전'을 벌인 정황도 1981년 외교문서에 적시됐다.
우리 정부가 각국 주재 대사관을 통해 중국 외교의 동향을 파악하고 중국 측과의 접촉면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3월 30일 자 외교부 문서에 따르면 주일 한국대사관은 제3국 리셉션 등에서 한국 외교관과 악수하거나 인사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제3국 대사주최 외교단 만찬에 한국대사와 함께 참석해도 무방하다는 중국 외교부의 내부 지침을 확인해 보고했다.
더불어 1981년 6월 30일 자 외교문서에 의하면 주 프랑스 한국대사 부부가 유네스코 사무총장 주최 티파티에 참석했는데 그간 냉담했던 중국의 유네스코 주재 대사가 의외로 말을 걸어왔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문서 작성자는 "중국 외교관의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고 덧붙였다.
kimhyo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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