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회의…"취임 선서에서 1948년 대신 1919년 기산한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두고 '건국'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자 재건'이라고 생각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8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승만의 역사의식'을 주제로 발표하고 이같이 주장했다.
한 교수는 제헌국회 개회사·국호 결정 과정·제헌헌법 전문·대한민국의 연호 등을 통해 비춰볼 때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이승만은 우선 1948년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기미년(1919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民國) 임시정부의 계승에서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헌국회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며, 연호의 시점은 1919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 교수는 "이승만이 언급한 임시정부는 1919년 4월23일 국내서 수립된 '한성정부'"라며 "한성정부는 이후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와 통합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실제로 대통령 취임 선서, 국무총리 임명안, 대법원장 임명승인안 같은 정부 문서에 1948년 대신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했다.
국호 '대한민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갑론을박에서도 이승만의 이 같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 제헌의원은 "국회 개원 시 의장 선생(이승만)이 '임정법통'의 정신을 계승한다 했고, 그뿐 아니라 국내에서 각 방면으로 '대한'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라고 말했다.
즉 이승만이 개회사에서 '대한민국'을 언급한 의도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한 교수는 제헌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계승 재건'을 명문화한 주역도 이승만이었다고 했다.
이승만은 1948년 7월1일 국회본회의에서 '우리들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월1일 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재건을 하기로 함'을 전문에 넣자고 제안했다.
한 교수는 이를 두고 "이승만은 외세에 의한 정부 수립, 즉 미국이 세워주는 민주주의 정부 수립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이미 1919년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해 민주정권을 유지·운영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내용은 '삼일혁명'이 '삼일운동'으로, '자주독립의 조국'이 '민주독립국가'로 바뀐 점을 빼고는 대부분 그대로 반영됐다.
이승만은 이 밖에도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기미년 3월1일부터 기산하여 29년 만에 자주민국을 부활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등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가 '대한민국 건립과 임시정부 수립',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법적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메모'를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김희곤 교수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대한민국이 건립됐다면서 "한국사 최초의 민주공화국, 곧 국민이 주인 되는 시민사회이자 근대국가를 세웠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구절을 담은 사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펼친 독립운동의 성과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며 "어느 나라나 민족이 나라를 잃은 사태에서 망명정부나 의회로 27년이나 버텨내면서 반제(反帝) 투쟁을 펼친 일은 찾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tsl@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