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석의 동행] 지금은 YS도 카터도 없지만

입력 2017-04-12 14:51  

[최재석의 동행] 지금은 YS도 카터도 없지만

(서울=연합뉴스) "관람자 여러분, 인디아 팀과 대한민국 팀 선수들이 입장하겠습니다."

지난 5일 저녁 평양 김일성경기장의 장내 아나운서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렸다. 이윽고 양 팀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오고, 태극기가 인도 국기, 아시아축구연맹(AFC)기와 함께 입장한 후 인도 국가에 이어 애국가가 연주됐다. 여자축구 대표팀이 평양에서 열린 2018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에서 인도팀과 격돌한 날이다. 이날 해트트릭을 기록한 이금민 선수는 "평양에서 애국가를 부르니 뭔가 뭉클하고 찡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은 AFC 규정에 따라 애국가 연주와 태극기 게양을 막지 않았다. 김일성경기장에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한 건 1969년 개장 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같은 날 저녁 강릉하키센터에서는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인공기가 걸렸다. 평창올림픽 테스트 이벤트 겸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2그룹에 출전한 북한이 영국과의 경기에서 이겨서다. 아이스하키 국제대회에서는 승리한 팀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연주된다. 이런 소식을 접하고 남북 간 스포츠 교류가 한반도에 평화를 움트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날 아침 북한이 동해 상으로 탄도미사일 1발을 또 쐈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때는 벚꽃이 만개한 봄이지만 한반도의 현실은 꽁꽁 얼어있다. '4월 위기설'로 전쟁 불안 심리가 높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 정상회담 후 한반도 주변에 미군의 전략무기를 집결시키고 있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감행하거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하면 당장 북한을 폭격할 수도 있을 태세다. 북한의 추가 도발 억지 차원일 것이다. 트럼프는 시리아가 민간인에게 화학무기 공격을 하자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밝힌 후 하루 만에 전격 공습을 단행했다. 트럼프 정부가 북한에도 '레드라인'을 설정했다면 북핵 문제의 당사자인 한국 정부가 그 내용을 알고 있을까. 정부가 속 시원히 밝히지 않으니 불안이 더한다. 한미 간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대북 선제타격론을 언급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마이크 멀린 전 미 합참의장이 미국 외교협회(CFR) 주최 토론회에서 "만약 북한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에 아주 근접하고 미국을 위협한다면 자위적 측면에서 북한을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발언했을 때만 해도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7개월이 지난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 사이 북한의 도발 수위는 점증했고, 미국에서는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비즈니스맨' 트럼프가 군 최고통수권자가 됐다.



그간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낮게 보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는 한국에 주한미군과 가족을 포함해 수십만 명의 미국인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이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것도 상수는 아닌 듯하다. 주한미군은 유사시 한국 거주 미국인을 대피시키는 '커레이저스 채널(Courageous Channel)' 훈련을 연례적으로 하는데 지난해 말에는 일부 민간인을 주일 미군기지까지 이동시키는 훈련을 했다. 미군 가족들을 한반도 밖으로 대피시킨 훈련은 2009년 이후 처음이었다. 미군이 훈련 차원이 아니라 실제 민간인 대피를 시작하면 김정은은 북한 공격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여겨 남한의 미군기지 등을 선제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주한미군 기지 등 미국에 보복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시리아와는 다르다.







지금의 한반도 위기는 1994년 북핵 1차 위기 때와 비견되곤 한다. 당시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자 대북 선제타격론이 나왔다. 클린턴 미 정부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폭격 계획을 입안했다가 북한의 반격으로 엄청난 피해가 예상됨에 따라 계획을 접었다. 김영삼 정부의 강력한 반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전쟁 위기를 넘기는 데는 평양으로 날아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다. 2017년 4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그만큼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크다. 중국 환구시보는 12일 "1차 핵실험이 있었던 2006년 이후 북미 간 무력 충돌 우려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한국이나 미국이 북한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안 보인다. 카터 같은 인물도 없다. 한국에는 대통령도 궐위 상태다.



트럼프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독자 행동' 옵션으로 검토 중이라는 대북 선제타격, 전술핵 한국 재배치 등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정해 미국에 분명히 말해야 한다.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섰다며 미국이 북의 핵시설을 타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갑자기 북미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대선 주자들도 미국이 대북 선제타격을 얘기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나마 유력 대선 주자들이 잇달아 '우리 동의 없이 북한을 선제타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 다행이다. 전쟁할 각오가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의 충돌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피해자는 우리다. 슬기롭게 4월 위기를 넘겨야 한다. 그래야 새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싹이라도 틔울 수 있다. <논설위원>

bond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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