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술의 역사와 문화, 향기 어우러진 공간
(충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술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모든 신화에는 언제나 하늘과 인간이 만나는 얘기와 제의(祭儀)가 있고, 여기에는 으레 술이 따랐다. 인류와 함께하면서 때로는 백약의 으뜸으로 대접받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만병의 근원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이처럼 양날의 칼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술은 어떤 역사와 문화를 지녔을까.
지난 2005년 문을 연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liquorium)'은 수락산락(水樂山樂)의 고장인 충주의 중앙탑공원 내 탄금호반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가 스며 있고, 국보 6호인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이 우뚝 서 있다.
리쿼리움은 술을 뜻하는 '리커(liquor)'와 전시공간에 흔하게 붙는 접미사 '리움(rium)'의 합성어다. 리커는 '녹는다'는 뜻의 라틴어 '리큐파세르(liquefacere)'에서 유래했다. 김영후 과학해설사는 "설립자이자 관장인 이종기 와인 마스터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술, 오크통, 라벨, 오프너, 스크루, 잔 등 술 관련 유물들이 동서양의 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해준다"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술을 즐기는 예절까지 술에 관한 모든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 '신의 물방울' 와인과 함께하는 술 역사여행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증류기는 한눈에 이곳이 술 박물관임을 알게 한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증류기 조형물은 스코틀랜드의 주류 제조사 '시그램'이 100년 동안 스카치 위스키를 증류할 때 쓰던 증류기를 분해한 뒤 배로 싣고 와 설치한 것이다. 증류기 두 개로 만든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매표소가 있고, 좌측으로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오크통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전시관 지붕이 눈길을 끈다. 매표소에서 미리 신청하면 전시실을 돌며 학예사나 과학해설사로부터 세계 각국의 술에 대한 기본 상식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술의 향기에 취한 듯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가 1475년에 그린 바쿠스(로마신화의 酒神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 복사품이 반겨준다. 주신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리스·로마신화뿐만 아니라 성경의 창세기에도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한 기록이 있는 등 술은 인류의 역사와 거의 함께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곧잘 술의 기원은 원숭이가 빚은 술이 예화로 등장한다. 움푹 팬 곳에 저장해 둔 과실이 저절로 발효된 것을 우연히 먹은 원숭이가 술에 취해 헤죽헤죽 웃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먹어 본 결과 맛이 좋아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발길을 옮기면 세계 각국 유명 와인과 와인의 역사, 제조법, 와인 평가방법, 보관법을 살펴볼 수 있는 와인관이다. 3천500년 전인 고대 이집트 벽화에는 포도를 수확하고 토기를 이용해 와인을 만드는 모습, 나일강에서 배를 이용해 교역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이집트벽화 바로 옆 벽면에는 와인과 소주, 맥주, 위스키 전파경로가 지도와 함께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포도와 포도주 전파경로가 중앙아시아에서 그리스와 지중해 연안으로, 소주는 중동에서 몽골과 중국을 거쳐 고려와 일본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후 과학해설사는 "와인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가 신에게 제물과 함께 올린 술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술"이라며 "와인은 포도가 전해진 지역에 가장 적합한 품종으로 육성됐다"고 말한다.
지중해 지역에서 사용했던 와인 저장용기인 암포라와 착즙기, 청동제 한나라 시대 술병, 1910년 독일의 맥주잔, 19세기 영국에서 사용하던 알코올 농도 측정용 비중계, 1982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 기념으로 시판된 스카치 위스키 등이 이채롭다.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항아리 '암포라'는 바닥이 평평하지 않고 뾰족해 똬리 위에나 모래를 파서 올려놓았다. 암포라는 나무통이나 가죽부대가 출현한 기원전(BC) 7세기까지 사용했는데 밑이 뾰족한 것은 포도주 찌꺼기 등 침전물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동그랗고 빨간 코냑 증류기가 시선을 끈다. 1830년 프랑스 코냑(Cognac) 지방에서 제작되어 1980년대까지 사용된 고전적 브랜디 증류기로 와인생성 과정을 배울 수 있다. 증류 솥에 와인을 넣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알코올 증기가 환류기로 끓어 오른다. 중앙의 구형 환류기에서 일부 냉각된 액체는 솥으로 되돌아가고 과열된 증기는 냉각기로 넘어간다. 냉각기에서 알코올 증기가 수냉식 코일에서 액화되어 브랜디 원액이 된다. 프랑스 코냑 지방의 브랜디가 특히 유명해 코냑이 브랜디의 대명사가 됐다.
와인제조에 사용되는 포도 품종과 포도재배 조건, 레드·화이트·로제·스파클링 등 각종 와인 제조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레드와인은 수확(포도송이의 줄기 제거) → 발효(포도껍질 성분을 우려내기 위해 포도즙을 순환시킴) → 오크통 숙성 → 새 오크통 교체해 찌꺼기 제거하기 → 와인 첨가해 목통 채우기 → 숙성 → 숙성와인 감별 → 여과 → 병입 출하로 이어지는 제조과정을 거친다.
프랑스·이탈리아·독일·스페인·포르투갈·칠레·미국·캐나다·호주·아르헨티나 등 나라별 와인의 특징과 분류법, 라벨 읽는 방법에 이르면 '신의 물방울'로 표현되는 와인의 복잡다단한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풍미가 좋고 당도와 산도가 높은 아이스 와인 하면 보통 캐나다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을 둘러보면 독일의 한 양조장에서 추운 날씨에 얼어버린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던 것에서 아이스 와인이 유래됐음을 알 수 있다.
'이종기 와인 마스터의 오미로제 코너'에서는 2012년 3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세계핵안보정상회의의 공식 건배주였던 오미로제 스파클링 와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토종 오미자로 만든 오미로제는 단맛·쓴맛·짠맛·신맛·매운맛이 조화를 이루고 색상과 향이 독특하다.
이곳에서는 꽤 까다롭게 느껴지는 와인 상표를 읽는 법과 보관·서빙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고급 와인의 라벨에는 포도의 수확 연도(Vintage)가 표기돼 있는데 이것은 그해의 온도, 일조량 등에 따라 포도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코르크 마개를 손상 없이 쉽게 열 수 있도록 개발된 각양각색의 코르크 스크루도 볼거리다. 코르크 마개가 부서질 경우 병 주위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내기 위해 한쪽 끝에 붓처럼 부드러운 솔이 달린 것이나, 벨기에의 오줌 싸는 소년을 연상시키는 것 등을 감상하다 보면 인간이 단순히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개성을 통해 문화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남자의 성기를 닮은 와인 디캔터(Decanter)도 볼거리다.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 그 향이 더 좋아지기 때문에 디캔터로 불리는 유리병에 미리 와인을 따라 놓는 것이 좋다.
◇ 숙성되는 위스키 느낌 오는 오크통관
'오크통관(館)'에서는 숙성되는 위스키를 직접 눈과 코로 느껴볼 수 있다. 4개의 오크통에는 첫해 담근 위스키 원액부터 12년, 17년, 21년 순으로 담겨 있는데 오크통 창을 톡톡 두드려 그 속에서 숙성되는 위스키 향을 직접 맡아 볼 수 있다. 위스키는 숙성과정에서 알코올이 1년에 1∼2%씩 증발하게 되는데 이를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부른다. 오래 숙성된 위스키가 비싼 이유는 천사의 몫까지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와인과 위스키를 숙성시킬 때 쓰는 오크통의 종류로는 배럴(180ℓ), 호그쉐드(250ℓ), 버트(500ℓ), 펀치온(500ℓ) 등 4가지가 있다.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짜 맞추다 보니 갖가지 공구들이 동원되는데 오크통 철판 테두리를 조이는 후드 드라이버 등 20여 개의 공(기)구류가 전시돼 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에도 기록될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맥주는 오늘날 현대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대중의 술이다. 맥주관에서는 맥주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맥주의 어원은 고대 게르만 민족의 곡물을 뜻하는 'BERE(베레)'라는 설과 라틴어의 '마시다'의 뜻을 지닌 'BIBERE(비베레)'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저그잔과 유리맥주잔, 주석잔, 세계 각국의 오프너도 재미있는 볼거리다.
'동양주관'은 단순히 마시기만 했던 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장소다. 8명의 신선이 생일축하연을 여는 팔선도를 감상할 수 있고, 선조들이 사용한 막걸리 항아리, 소주 항아리, 꿰맨 항아리까지 전시돼 있다. 벽면에 쓰여 있는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나를 청하시오/ 초당에 꽃이 피거들랑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라는 김육의 시조를 마음 속으로 읊어본다.
◇ 전통주 맛볼 수 있는 아트홀
전통주관은 실물과 도표를 적절히 배치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전통주에 대한 상식과 깊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했다. 전통주 제작과정은 물론 산머루·복분자·석류·오미자·사과·다래 등 한국 과실주의 역사, 각 과실의 효능 등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주가, 병주가, 내외술집, 주막, 목로술집(선술집), 색주가, 소주가 등 우리나라의 주점 이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전통주관을 지나면 2층 아트홀로 이어진다.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트홀에서는 칵테일, 와인, 전통주 등을 맛볼 수 있다. 전시관 옆의 발효교육과학관에서는 전통주 빚기, 제철 과일을 이용한 유기농 와인 만들기, 칵테일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관람 정보]
▲ 개장 =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 신정·설날·추석 전날과 당일 휴관
▲ 입장료 = 대인(대학생 이상) 5천원, 소인(초·중·고생) 4천원, 관람+시음1종 8천원, 관람+시음2종 1만원(시음은 와인, 커피, 차 등 선택), 관람+칵테일 체험(사전예약) 1만4천원 ☎ 043-855-7333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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