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이토록 황홀한 블랙'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세련미를 강조하는 검은색이 여성 패션의 중심에 등장한 건 20세기 들어서다. 1926년 패션 디자이너인 코코 샤넬이 발표한 '리틀블랙드레스'는 과거에는 상복에 주로 쓰이던 검은색의 매력을 각인시켰다.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은 어깨가 드러나는 지방시의 새틴 블랙드레스에 검은 긴 장갑을 낀 채 등장, 전 세계를 사로잡은 블랙패션의 아이콘이 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검은 옷은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반란자나 역경을 헤쳐나가는 개척자들의 옷이었다. 검은색은 무겁고 신중하고 결연한 이미지 덕분에 타락한 엘리트 지배층을 비판하고 전복하려는 집단들이 즐겨 입었다.
이런 점에서 20세기에 확산된 여성들의 블랙패션은 여권 신장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이 본격화됐음을 알린 시대 변화의 징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신간 '이토록 황홀한 블랙'(위즈덤하우스 펴냄)은 패션뿐 아니라 신화, 의학, 미술, 문학 등을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검은색의 궤적과 사회적, 정치적, 미학적 의미를 추적한다.
저자인 존 하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석학교수는 35년 이상 검은색의 역사를 천착해온 검은색 연구의 대가로 앞서 '블랙패션의 문화사'(심산 펴냄)를 펴냈다.
초기 인류에게 검은색은 어둠에 대한 공포와 직결된 탓에 죽음, 공포, 부정을 상징했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인간에게 검은색은 희색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매혹적인 색이다. 힌두교를 비롯한 많은 고대 종교에서는 검은색이 죽음과 파괴를 뜻하는 동시에 엄격한 초월적인 신성을 의미했다.
죽음을 죄와 연관 짓는 기독교가 전파된 뒤로는 검은색에 죄악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하지만 이는 검은색이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계기가 됐다.
성직자나 조문객이 입던 검은 옷이 유럽에서 세련된 일상복으로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15세기 무렵부터다. 이와 함께 화단 등 예술계에도 검은색이 급부상했다.
17~18세기 제국주의의 발흥, 노예무역과 함께 검은색에는 인종주의적 색채가 덧입혀지기도 했으나, 19세기에는 '블랙의 시대'라 할 만큼 검은색이 문화 전반에 주된 색조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검은색은 여전히 엄격함과 세련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죄악 등 부정적 뉘앙스는 희석돼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와 같은 판타지 영화 속에서나 명맥을 잇고 있다.
저자는 "검은색의 역사는 인간의 공포를 조금씩 점령해 나간 역사"라고 말한다.
윤영삼 옮김. 580쪽. 1만8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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