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인 이야기 새겨진 반구대암각화
(울산=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까마득한 옛날. 단군이 즉위했다는 기원전 2333년보다 훨씬 오래전, 이 땅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누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울산 대곡천 하류, 경기도 연천 전곡리, 해남 우항리에서 기록되지 못하고 흔적으로만 남은 한반도 선사인(先史人)들의 발자취를 찾아봤다.
화사한 햇살이 울산 두동면 대곡천 골짜기를 포근하게 어루만지던 지난 4월 초순 오후. 굽이 도는 물길을 따라 자리 잡은 낮은 봉우리들은 초록빛을 머금기 시작했고, 싱그러운 연둣빛이 번지는 천변 풀밭에는 제비꽃이 선연한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열고 여기저기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윽고 오후 4시 무렵 물길 맞은편 반들거리는 황톳빛의 커다란 바위 절벽에 햇살이 닿기 시작했다. 절벽 오른쪽에 세로로 갈라진 부분이 빛을 받아 환하게 돌출하더니 돌연 절벽 전체적으로 그림들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바위 절벽 왼쪽에는 고래가 무리 지어 유영하고 있다. 새끼를 등에 업은 듯한 귀신고래와 물을 내뿜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와 범고래, 작살을 맞은 고래를 볼 수 있고 거북, 상어, 물개, 물새도 있다. 바위 절벽 오른쪽으로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 육지동물이 새겨졌고 군데군데 사람의 형상과 배·작살·부구(浮具) 등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와 사냥 도구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가로 8m, 세로 5m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에 새겨진 그림은 300여 점이나 된다. 마땅히 기록할 문자가 없던 7천 년 전 선사인은 돌로 바위를 쪼거나 긋고 갈아 그림을 그렸다. 마치 먼 미래의 사람들과 시간을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듯 바위에 또렷한 그림을 남겼다.
◇ 신비롭게 펼쳐지는 7천 년 전 역사책
암각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주로 왼편에는 바다동물이, 오른편에는 육지동물이 있다. 수중과 육지 세계를 구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표현된 동물은 22종으로, 전 세계 암각화에 나타난 동물 중 종류가 가장 많다고 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고래. 50점 이상이 고래 그림이다. 종류도 다양하다. 묘사된 고래를 보면 생동감이 넘친다. 마치 무리 지어 헤엄치는 고래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표현했다. 세 마리가 나란하게 있는 북방긴수염고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물을 뿜고 들이켜고 뿜는 동작이 차례로 나타난다. 작살을 맞은 고래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고, 줄무늬가 선연한 배를 드러낸 혹등고래는 물 밖으로 나왔다가 곤두박질하는 것 같다.
선사인의 고래잡이 모습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사람을 태운 반달처럼 휘어진 배 아래로 고래가 줄로 연결돼 있고, 고래 옆에서는 물에 뜨게 하는 도구인 부구도 많이 관찰된다. 선사인들은 밧줄이 달린 작살을 던져 고래를 맞힌 후 부구로 위치를 확인하고 고래가 지쳐 죽으면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사냥했다. 신기하게도 현대의 고래 사냥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상목 울산암각화박물관장은 "암각화를 새긴 집단이 실제 고래를 사냥하며 살아간 것을 엿볼 수 있다"며 "이 그림은 지구 상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에 대한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암각화에서는 사람의 전신상 10점과 얼굴상 2점도 발견된다. 팔다리와 손발가락을 잔뜩 벌린 우스꽝스러운 모양, 악기를 연주하듯 긴 막대기를 입에 댄 모습, 벌거벗은 몸에 남근이 과장되게 표현된 남성, 활을 들거나 고래를 잡는 사람 등을 볼 수 있다. 역삼각형 안에 눈코입을 새겨 넣은 마치 가면 같은 형상도 있다.
육지동물도 여럿이다. 나뭇가지 같은 뿔이 달리고 몸통에 반점이 있는 대륙사슴, 우아한 뿔을 가진 붉은 사슴, 노루와 고라니 등 사슴류가 있고 줄무늬가 선연한 호랑이와 꼬리가 긴 여우, 목이 긴 늑대, 멧돼지, 너구리 등 육식동물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일부 동물들의 모습이 계절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대형 고래는 울산 지역에서 늦가을부터 봄철에만 볼 수 있고, 새끼 멧돼지는 봄철에만 보인다. 너구리가 짝짓기하는 장면도 봄철에만 관찰된다.
이상목 관장은 "암각화는 당시 굉장한 권위를 가진 예술가이자 제사장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그림으로 사냥하는 철을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평소엔 그저 반질반질한 바위 표면
맨눈으로는 암각화를 쉽게 볼 수 없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가 물길 건너에 있고 암각화 보호를 위해 반대편 언덕에 설치된 망원경으로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망원경을 이용해도 아무 때나 볼 수는 없다. 평소에는 그저 반질반질한 바위의 표면만 보인다. 암각화를 제대로 보려면 3월부터 10월 초 사이 날씨가 맑은 날 늦은 오후에 방문해야 한다. 정말 잠깐이므로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하지만 인근 울산암각화박물관에 가면 일 년 내내 암각화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실물 크기로 제작한 반구대암각화가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림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설명도 보고 들을 수 있어 반구대암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7천 년 전 풍경이 눈앞에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에는 대곡천 상류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암각화인 천전리 각석(刻石, 국보 제147호)의 실물 모형도 함께 전시돼 있다. 이 바위에는 농경시대를 상징하는 동심원과 나선형, 물결문과 함께 신라 시대 인물·기마행렬과 화랑의 이름이나 당시 직위명을 한자로 새긴 것도 볼 수 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 반구대암각화 전망대까지 1.2㎞ 구간에는 물길이 휘도는 청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경주 최씨 문중의 정각인 집청정을 등지고 서면 3단 바위가 하늘을 향해 솟은 반구대(盤龜臺)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반구대암각화 방향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이름처럼 거북이가 엎드린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반구대암각화 방향으로 가면 버들회나무, 오리나무가 맑은 풍경을 선사하는 자연습지와 시원한 대나무 숲을 지난다.
◇ 장생포에서 만나는 살아 있는 고래
진짜 고래를 만나고 싶다면 장생포를 방문하면 좋다. 그곳에는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이 있고 고래문화마을도 있다. 장생포고래박물관에는 고래의 실제 골격과 수염, 귀신고래 실물 모형 등 고래와 관련된 흥미로운 것들이 전시돼 있다. 바로 옆 고래생태체험관에서는 돌고래의 재롱과 다양한 바다 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최근 퇴역한 국산 1세대 호위함 '울산함'도 체험관 옆에서 만날 수 있다.
고래박물관 맞은편 고래문화마을은 장생포 옛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다. 옛날 교복을 입고 고래해체장과 착유장, 학교와 이발소, 사진관, 방앗간 등 1960~1970년대 고래잡이로 호황을 누리던 옛 장생포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장생포에서는 옛 선사인처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래를 만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11월까지 화·수·목요일 오후 2시, 금요일 오후 1시, 토·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등 매주 총 8차례 고래탐사에 참가할 수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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