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릴리트'·장편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거기서 그가 도와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 말고도 이탈리아인들과 다른 외국인들까지 돌봐주었지만, 그 사실을 내게는 비밀에 부치는 게 좋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허영심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로렌초의 귀환' 중)
20세기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소설집 '릴리트'(돌베개)가 번역돼 나왔다. 작가는 서른여섯 편의 단편에서 사실과 허구를 뒤섞고 환상적 세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폭력과 선악을 중심으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 본연의 주제의식은 '정통' 증언문학 작품과 다르지 않다.
책에는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오는 로렌초, '휴전'의 체사레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린 두 단편이 나란히 실렸다. 작가는 수용소 시절 민간인 벽돌공인 로렌초가 매일 반합에 담아 건넨 죽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죽에서는 깃털 달린 참새 날개와 신문 쪼가리가 나오기도 했다. 로렌초가 저녁마다 동료들이 남긴 음식을 걷어다 준 것이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조건 없는 이타주의'를 보여준 로렌초는 그러나 귀환 이후 노숙을 하고 술을 마셔대며 지내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는 세상이 어떤지 보았고, 그것이 싫었으며, 그것이 몰락해간다고 느꼈다. 살아가는 것에 더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폭력의 목격자였을 뿐이지만 그가 입은 고통과 상처는 생환자의 그것 못지않았다.
로렌초와 반대로 체사레의 귀환은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체사레는 고국 이탈리아가 아닌 루마니아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그곳에서 몇 번의 실패 끝에 자산가의 딸에게 환심을 사고는 결혼지참금만 챙겨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헌병대원들에게 붙잡혔다. 장인이 준 돈이 위조화폐였기 때문이다. 체사레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평온하고, 만족스러울 정도로 현명하며, 운명으로부터 혹독하게 단련받은 노인"으로 살면서 수용소 경험이 전부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음을 입증했다.
'신전의 야수'는 탈출구 없는 신전에 갇힌 채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는 야수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화된 폭력을 폭로한다. '탄탈럼'에서는 불행을 없애고 행운을 가져온다는 물질을 둘러싼 인간의 집착과 속임수를 꾸짖는다. 작가 이전의 본업인 화학자로서 면모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옮긴이 한리나씨는 "레비는 여러 유형의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 의식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347쪽. 1만3천원.
1943∼1945년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 러시아·폴란드계 유격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지금이 아니면 언제?'도 함께 출간됐다. 레비의 친구가 밀라노의 난민지원 사무실에서 봉사활동하며 러시아 출신 유대인 유격대원에게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1981년 발표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결합한 레비의 '첫 소설'로도 꼽힌다. 국내에서는 2009년 나왔다가 절판 상태였다. 이탈리아어 전문 번역자 이현경씨가 새롭게 옮겼다. 539쪽.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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