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과 흑인 청소년들 손잡고 코리아타운 걸어 '그날의 상처 씻자'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도심에서 한인과 흑인이 손을 맞잡고 행진했다.
29일 오전 11시(이하 현지시간) LA 다운타운 올림픽 블러바드와 노르망디 애비뉴가 만나는 사거리.
25년 전 그날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경관 4명에게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 내려진 순간, 성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약탈과 방화를 시작했던 바로 그 현장이다. 재미 한인 이주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4·29 LA 폭동이다.
당시 흑인 폭동으로 한인 상점 2천300여 곳이 약탈·방화 등 물적 피해를 봤고 그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폐업한 업소도 수두룩했다.
월드스페셜페더레이션 주최로 한인과 흑인 1천500여 명이 펼친 이 날 평화 대행진은 이곳에서 시작해 한인타운 밀집 지역을 지나 버몬트 애비뉴까지 이어졌다.
행사를 주관한 존 김 사우스베이 한인회장은 "사반세기 만에 참혹했던 사건 현장에서 양 당사자인 한인과 흑인이 다시 손을 맞잡았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태권도복을 입은 흑인 소년이 한인 친구와 손을 잡고 코리아타운 거리를 힘차게 걷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어른들의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힙합 뮤지션 차림의 흑인 청소년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행진하는 모습도 보였고, 곳곳에서 흥겨운 음악이 들렸다.
행진에는 LA총영사관 이기철 총영사와 재미 한인사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행진이 펼쳐진 도로 주변에는 어린 한인 학생들이 그날의 상처에 대해 부모 세대로부터 전해 듣고 고사리손으로 그린 100여 점의 그림도 전시됐다.
4·29 폭동이 남긴 상처를 씻어내는 것은 물론 미래 세대에도 인종 갈등의 교훈을 심어주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전시회다.
이날 행사에는 한인과 흑인만 참가한 게 아니다.
라티노(히스패닉) 장애인연합회는 시내 윌셔 블러바드에서 'LA, 손을 맞잡고(Hands across)' 행사를 열었다. 한인과 히스패닉 참가자들이 웨스턴 애비뉴부터 버몬트 애비뉴까지 행진했다.
LA 한인사회는 폭동 25주년에 즈음해 흑인, 히스패닉 등 LA 인구를 구성하는 타인종과의 화합을 유난히 강조했다. 연대와 포용의 초점이 흑인뿐만 아니라 라티노 공동체에도 맞춰진 것이 특징이다.
잊혀진 영웅을 되살리자는 운동도 펼쳐졌다.
캘리포니아주 의회 세바스티안 리들리 토머스 의원실의 스티브 강 지부장은 "당시 폭동의 와중에서는 약탈, 방화와 폭력을 말리던 흑인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LA 한인회는 이날 폭동 현장에서 가까운 FAME 교회에서 '100명의 찬사 받지 못한(unsung) 영웅' 선정 행사를 열었다.
앞서 지난 19일에는 한인과 흑인, 라티노 공동체가 경제·상공부문에서 협력하자는 다민족 비즈니스 믹서 행사도 열렸다.
LA 한인상공회의소와 흑인·중미계 상공회의소 단체들이 대거 참여했다.
4·29 LA 폭동은 1992년 4월 29일 교통 단속에 걸린 흑인 청년 로드니 글렌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경관 4명에게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분노한 흑인들이 LA 도심으로 일제히 쏟아져 나와 폭력과 약탈, 방화를 일삼은 사건이다.
5월 3일까지 이어진 폭동으로 사망자 53명, 부상자 4천여 명의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 10억 달러를 기록했다.
oakchu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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