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오가사와라 제도 다룬 신간 '군도의 역사사회학'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태평양에 있는 섬들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는 행정구역상 일본 도쿄도(東京都)에 속한다. 하지만 도쿄에서 이 제도까지의 거리는 1천㎞에 달한다.
19세기 초반까지 오가사와라 제도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는 오랫동안 육지와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곳을 '동양의 갈라파고스'라고 부른다. 공교롭게도 오가사와라 제도와 갈라파고스 제도는 모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1880년 공식적으로 영토에 포함시킨 오가사와라 제도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沖繩)와 홋카이도(北海道)와는 사정이 다르다.
오랫동안 오가사와라 제도를 연구해온 이시하라 ?(石原俊)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신간 '군도의 역사사회학'에서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 일본 본토가 아니라 오가사와라 제도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원양어업을 하는 포경선에서 탈출한 선원들이 모여들면서 인간의 정주가 시작됐다. 이들은 국적이 다양했고, 선상 생활에서 경험했던 엄격한 규율을 원하지 않았다. 저자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지배했던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의 모습을 '바다의 노마드'라고 표현한다.
변화는 일본이 영토 확장과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나타났다. 일제는 1920년대까지 오가사와라 제도와 그 남쪽에 있는 이오(硫黃) 열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집중적으로 운영했다.
오가사와라 제도를 자그마한 식민지쯤으로 여겼던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노골적으로 섬을 이용했다. 주민들을 전장에 내몰고 삶의 터전을 철저히 파괴했다. 생김새가 일본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스파이로 내몰려 살해된 주민도 있었다.
일제는 전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던 오가사와라 제도를 패망 이후 내버렸다. 승전국인 미국은 이 섬들을 차지한 뒤 핵탄두를 배치했고, 원주민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도 주민들은 미·일 합작의 난민화와 그에 따르는 모순을 짊어져야 했다"며 "그들은 일본 총력전의 버리는 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화 국가' 일본 부흥의 버리는 돌로도 이용됐다"고 지적한다.
1968년 오가사와라 제도가 다시 일본의 영토로 편입됐지만, 이오 열도의 미군 기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1940년대 강제로 이오 열도를 떠난 사람들은 지금도 귀향이 금지된 상태다.
저자는 "근대 국가를 형성하려던 일제가 섬들로부터 자율성과 중심성을 빼앗고, 변경성과 종속성을 부여했다"며 일본의 군사주의와 식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어 "현재 일본 사회의 역사의식도 편협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로 가득 차 있어서, 실로 참담하다"고 꼬집은 뒤 "군도와 바다의 눈으로부터 현대 세계를 다시 보자"고 제안한다. 일본 정부의 영토에 대한 과욕과 억지 주장이 독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책이다. 김이인 옮김. 288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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