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작가 박윤선의 신간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30대 후반의 다미앙이 운영하는 앙굴렘의 낡은 시골풍의 카페에는 롱코트로 멋을 부린 하르키 할아버지가 종종 들르는데, 술을 딱 한 잔 시켜놓고선 오랫동안 혼자 소리높여 떠들다 가곤 한다.
하르키는 프랑스 식민 통치를 받던 알제리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일으킨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 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알제리인들을 가리킨다. 전쟁이 끝난 뒤 7만 명의 하르키와 가족들이 알제리에서 반역자로 다수가 학살되거나 고초를 겪었고, 6만 명의 하르키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박윤선 작가의 신간 만화책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사계절 펴냄)에는 작가가 프랑스의 남서부 소도시 앙굴렘에 살면서 오다가다 만난, 다양한 색깔과 이력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
프랑스로 망명을 온 아르메니아인 청년 L, 프랑스에서 가정을 꾸린 콩고 출신 남자 무용수 Y, 퇴직 후 조류 관찰을 취미로 삼게 된 프랑스어 교습소의 포어 선생, 프랑스에 정착하기 위해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낸 북아프리카계 무슬림 여자 F, 한때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늙은 피아니스트, 프랑스 전통놀이인 페탕크 선수로 뛰고 있는 전직 프랑스 군인 등등.
등장인물 중 다수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분쟁과 갈등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지만, 작가는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백한 그림체로 따뜻하고 담담하게 그려낼 뿐 함부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많게든 적게든, 살아 있는 우리는 다 죄를 짓기 마련이고 저지르는 죄도 다 다르니, 한 가지 기준으로 모두를 묶을 수는 없는 거라고." (본문 중에서)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다. 작가는 만나고 사귄 인물들을 통해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와 과거의 삶을 반추하고 성찰한다.
그리고 2015년 파리 테러와 같은 끊이지 않는 동시대 비극을 되새기고, 한국의 촛불집회 등을 돌아보며 예술과 사회, 국가의 의미를 살피기도 한다.
만화책이지만 만화라기보다 여운을 주는 간결체의 단편소설 같은 느낌이다. 언뜻 1980년대 달동네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렸던 양귀자 작가의 연작 단편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살던 작가는, 만족감 없이 떠밀려서 사는 삶이 싫어 스물아홉 살이던 2008년 불쑥 프랑스행을 결정했다. 원래 만화 창작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2년간 머물려던 것이 프랑스인 남편까지 만나 벌써 9년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공무원이 되려다 경찰견이 된 남자의 모험을 그린 만화책 '개인간의 모험'을 프랑스와 한국에서 출간했다. 108쪽. 1만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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