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방미 초청에 답 미루며 "화력으론 김정은 겁 못준다" 훈수
中과는 연합군사훈련 의향도 밝혀…친중 행보에 경제적 보답 요구
(하노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외교술이 주목받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친미 국가라는 이미지를 던져버리고 지정학적 이점과 함께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의장국이라는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들 강대국의 경쟁적 구애를 받으며 전임 정부와 달리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2일 GMA 뉴스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두테르테 대통령은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을 백악관에 초청한 것과 관련, "어떤 확답도 할 수 없다"며 "러시아도 가야 하고 이스라엘도 가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아세안 순회 의장국을 맡은 필리핀을 앞세워 아세안 차원의 대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을 초청했지만, 의례적인 수락 답변조차 듣지 못해 체면을 구긴 셈이 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화력으로 김정은(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겁줄 수 없다고 말했다"며 양국 정상의 전화통화 내용을 직접 공개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의 대화 기회가 중국의 중재로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중국 역할론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북한의 그 남자(김정은)를 막는 것은 중국에 맡겨야 한다"며 "핵전쟁에 승자는 없다. (한반도에 파견된) 미군의 군함은 공포를 부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필리핀 관계는 전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작년 하반기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과의 유혈전쟁'을 인권유린이라고 비판하면서 급속히 냉각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양국 연합군사훈련을 대폭 축소하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을 거점으로 한 미국의 중국 견제에 구멍이 생겼다.
게다가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까지 불거지자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동남아에서 필리핀의 협력이 절실해졌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를 기회로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키우며 미국과 필리핀의 대등한 외교관계 정립을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에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경제·방위 지원을 끌어내고 있다.
그는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성명에 중국 입장을 반영, 남중국해 영유권 사태에 대한 언급 수위를 최대한 낮춘 데 이어 1일에는 자신의 고향인 필리핀 남부 다바오 시를 방문한 중국 군함을 찾아 양국 연합군사훈련을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달 중순 중국에서 열리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상회의에 참석할 때 필리핀 경제 개발을 위해 중국의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친중 행보에 대한 보답을 사실상 요구했다.
필리핀의 정치 전문가인 리처드 헤이다리안 데라살레대 교수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1라운드에서는 우리가 양보했으니 다음에는 중국이 양보해야 한다는 요구를 해야 한다" 지적했다.
예컨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해역에서 중국이 필리핀 어선의 조업을 막지 않고 방공식별구역도 선포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달 말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며 양국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그는 미국이 없으면 중국,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 된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며 외교 다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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