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희망마저 앗아간 화마(火魔)…"남은 게 하나도 없다"
주저앉은 주민들…잔해 속 뒤지며 소중하거나 쓸만한 물건 찾아
(강릉=연합뉴스) 유형재 기자 = "이번 화재로 집이 전부 타버렸습니다…생후 24일 남아가 있는데 혹시 안 쓰는 아이 옷이나 용품 등이 있다면 도움 주실 수 있으실지요?"
지난 6일 강원 강릉 산불로 인해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이 커지고 있다.
7일 새벽 강릉 지역의 한 맘카페에는 '관음리 화재로 집이 다 타버렸어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염치없이 이런 글 올리는 것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성산 관음리 화재로 집이 전부 타버렸습니다"고 운을 떼며 자신의 말을 믿어도 좋지만, 안 믿어도 심한 얘기는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글쓴이의 사정을 이랬다. 전날 재난 알림 등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집 안에 24일 된 아들과 함께 있다가 불길이 번지면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다행히 아들의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급하게 쓸 신생아 용품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 여성은 "아들의 하나밖에 없는 옷을 버리지 않으려고 구호 물품에서 생리대를 꺼내 수유패드 대신 가슴에 대고 아기와 잠들려는데 자꾸 막막한 생각만 드네요"라며 당시의 불안한 심경을 밝혔다.
이어 "혹시 안 쓰시는 아이 옷이나 용품 등이 있다면 도움 주실 수 있으신지요?"라고 물으며 "당장 살 집이 없이 아이와 함께 헤쳐나가야 할 상황이라 답답한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라며 사과한 뒤 글을 끝맺었다.
이에 맘 카페 회원들은 여성을 돕겠다며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이밖에 SNS와 포털 등 온라인에는 자신이 직접 겪었거나 지인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기자가 직접 돌아본 산불 피해 현장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화마(火魔)에 녹아내린 삶의 터전 앞에서는 이재민들의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가재도구가 뭐야, 남은 건 입고 있는 게 전부야"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송두헌(84) 할아버지는 7일 날이 밝자마자 불에 탄 집을 찾았으나 "남은 게 하나도 없다"라며 망연자실했다.
아들과 함께 집을 찾은 송 씨는 "어제 4시쯤 연기가 심해 시내 큰아들 집으로 대피했는데 이렇게 됐다"라며 탄식했다.
이 집은 17년 정도 아내와 함께 살던 곳이다. 시골집이지만 아내와 마당에 잔디를 잘 가꿨을 정도로 온갖 정성을 쏟은 곳이어서 더욱 아쉬워했다.
불에 탄 집에 성한 것이라고는 한 개도 없었다. 모두 검게 그을리고 무너져 내렸다.
송 씨는 "아내 몸이 아픈데 이제 집까지 없어져 걱정"이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라고 끝내 울먹였다.
집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곳에서 뭔가라도 건져볼까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송 씨 집 인근의 전학표(57) 씨 집도 불에 타 폭삭 주저앉아 검게 탄 흔적만 남았다.
전 씨는 "4시 좀 넘어서 입은 채로 도망 나왔다"라며 "남은 거라고는 트럭하고 몸뚱이뿐"이라며 흐느꼈다.
이곳은 전 씨 부부가 아들하고 3명이 단란하게 30년 가까이 살던 곳이다. 좋은 집은 아니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뤘던 곳이다.
대피 장소 안내조차 못 받아 시내로 대피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이 소실된 것을 알았다.
부부는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이라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전 씨는 "각종 서류, 문서, 가재도구 모든 게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집을 지키고 있던 개는 화마를 피했다.
집 뒷산의 아름드리 소나무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몇 해 전 2천만원 준다고 팔라고 한 것을 아끼는 소나무가 팔지 않았는데 이번에 모두 다 죽게 생겼다"라며 "그때 팔았더라면 소나무는 살았을 텐데"라고 소나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아직도 연기가 솟고 있는 불에 탄 전 씨의 집에서는 산불 조심 깃발만 무심히 펄럭이고 있었다.
전 씨 집 주변의 목재 등을 사용한 옛날 집들은 모두 피해를 보았다.
성산면 관음리 외에도 강릉시 관문인 사임당로 주변의 가옥도 불에 타 처참한 모습을 보이는 등 곳곳에 화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홍제동의 한 피해 주민은 군 장병들이 잔불 제거 작업을 벌이는 가운데 불에 탄 집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를 털어냈다.
불에 그슬린 족보였다. 족보는 물론 요강, 밥솥 등 모두가 시커멓게 불에 타 쓸 수 없게 됐다.
이 주민은 하룻밤 사이 폐허로 변해버린 거처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없는지 오래 살폈다.
yoo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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