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트럼프 '북핵 폐기' 공감 속 압박 vs 포용 갈등 가능성도
사드 비용 논란·방위비 협정·한미FTA 등 민감한 현안도 산적
(워싱턴=연합뉴스) 강영두 특파원 = 5·9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승리하면서 한미관계는 새로운 여정의 출발선에 서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해 한미 양국이 긴 정상외교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미국에서는 공화당으로 8년 만에 정권교체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8년여 보수세력의 집권 이후 중도진보 세력인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America First)을 기치로 내걸고 전임 버락 오바마 정부와는 사뭇 다른 대외 기조를 천명했고, 당선 확정과 함께 이날 출범하는 문재인 정부도 대북 정책에서 사실상 압박·제재 일변도였던 전임 이명박·박근혜 정부와는 그 기조가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미 양국 정부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조율해야 할 민감한 현안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비롯한 북한 문제 대처 방식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비용 부담 및 방위비 협상,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이 한미동맹 관계의 앞날에 긴장을 조성할 공산이 큰 대표적인 사안들이다.
'70년 가까운 동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최우선 현안은 북한 문제 대처 방식을 둘러싸고 노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문재인-트럼프 정부 간 온도 차를 양국이 얼마나 서로 솔직하게 털어놓고 세밀하게 조율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라는 데 대해선 이견은 없어 보인다.
미국 일부 주류 언론과 한반도 전문가들이 문 후보의 대선 승리를 계기로 해서 '최대의 압박과 관여'라는 봉쇄 수준의 대북 옥죄기를 밀어붙이는 트럼프 정부와, 제재뿐 아니라 포용에도 비중을 두는 문재인 정부 간에 북한 문제를 놓고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을 거론하고 나서는 데서 한국 새 정부의 향후 행보를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미국 조야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4일 문 후보가 당선되면 "햇볕정책을 계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제한 뒤, 박근혜 전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에 대대적 기조 변화가 예상되고, 강경노선을 이어가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음을 내기도 했다.
서로 낯설고 익숙지 않은 상황이어서 초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양국이 '북핵 폐기'라는 큰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인식 차를 보이는 세부 사항들을 조율하면서 얼마든지 잘 협력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최근호에서 문 당선인을 표지 인물로 올리며 '협상가'(negotiator)라는 제목으로 그의 대북 정책을 소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타임은 문 당선인의 대북 정책을 '신중한 포용'(measured engagement)이라고 표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립 가능성을 거론하면서도, 문 당선인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통해 충분히 입장을 조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쪽에 방점을 찍었다.
타임은 "문 후보가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를 실패로 규정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과도 대화를 통해 설득하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문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강한 압박과 제재, 그리고 선제 타격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궁극적 목표는 북한을 핵 폐기 프로그램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해 한미 양국 내에 제기되는 두 정상 간의 '충돌' 우려를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문 당선인은 지난 3일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한미동맹은 국가안보와 외교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한 것을 비롯해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대선후보 TV토론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한미 간 공조를 통해 해결 방안을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한반도 정세의 미묘한 변화도 눈에 띈다. 북한이 태양절(김일성 생일·4월 15일)과 건군절(4월 25일) 등이 겹친 지난달에 6차 핵실험을 하지 않는 등 '한반도 4월 위기설'이 일단 해소되면서, 트럼프 정부도 대북 압박과 함께 대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한반도 주변 해역에 미 항공모함을 배치하는 등 북한을 겨냥해 군사적 위협을 서슴지 않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적절한 상황'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직접 대화할 용의까지 밝힌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공식 정부 차원은 아니지만 8일부터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반관반민의 '트랙 1.5 대화'를 진행 중인 것은 트럼프 정부의 기류 변화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 국무부가 대선 투표 개시 직전인 9일 새벽(한국시간) 연합뉴스에 보낸 논평에서 "한국의 새 대통령과 우리(한미 양국)의 긴밀하고 건설적이며 깊은 협력관계를 지속해서 유지해 나가길 고대한다"고 말한 대목은 한미동맹이 굳건하게 유지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
카티나 애덤스 국무부 동아태 담당 대변인은 "미국은 한국의 변함없는 동맹이자 친구, 파트너로 계속 남을 것"이라며 "한미동맹은 앞으로도 계속 역내 안정과 안보를 위한 린치핀(linchpin·핵심축)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언제 불붙을지 모르는 휘발성으로 따진다면, 한미동맹 관계에서 사드 비용 부담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안보 위기가 정점을 치닫던 지난달 말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불쑥 '10억 달러' 짜리 사드 비용 청구서를 한국에 내밀어, 한미 양국 내에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전쟁을 함께 치르면서 '혈맹'이라고 불리는 한미 동맹관계도 철저한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하고, 상대국 입장을 개의치 않는듯한 돌출 발언들을 수시로 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양식이 앞으로 한미관계에 적잖은 긴장을 불러올 우려가 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검토와 상의할 여지를 주지 않고 사드 비용과 방위비 인상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부친다면, 한미관계는 새 정부 초반부터 삐걱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 보인다.
앞서 대선 후보로서 문 당선인이 트럼프 대통령의 사드 비용 한국 부담 발언에 대해 "이쯤 되면 사드 배치를 국회에서 살펴보고 따져봐야 한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사드 배치 및 비용부담 문제는 언제든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동맹에 더 많은 안보 비용 부담을 떠안길 것이라고 공언한 터라, 앞으로 비단 사드뿐 아니라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이 거세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은 내년 말 만료하는 만큼 연내에 협상이 개시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미국의 한미FTA 재협상 요구 역시 발등의 불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12개국이 참여한 다자간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 선언을 하고, 양자 간 FTA 체결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협상의 달인'으로 자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활약 무대가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곳곳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새로운 FTA 체결보다 수월한 재협상 대상인 한미FTA가 먼저 재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대선 기간 한미FTA를 미국 근로자들의 '일자리 킬러'라고 지목했던 그는 최근 "끔찍한(horrible) 한미FTA를 재협상하거나 종료하길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이 동맹국을 향해 안보와 통상을 고리로 일방통행식으로 관계를 주도하려 든다면 한국 내 정치권과 국민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고조되는 등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두 정상 간의 공식·비공식 접촉을 통해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을 우선적으로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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