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 교수 "북학파에게 문학은 즐겁게 살고자 했던 욕망의 표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년처럼 긴 봄날에 화고(畵鼓, 북)가 재촉할 때/ 대궐 도랑 동쪽에는 살구꽃이 피어났네/ 한 무리의 분바른 여인들 킥킥대고 웃으며/ 땅딸보만 부르는 내가 이상하다 말하는군"
영재(영<삼수변에 令>齋) 유득공(1748∼1807)은 1784년 왕실의 의복을 관리하는 상의원(尙衣院)에 찾아온 초정(楚亭) 박제가(1750∼1805)를 '땅딸보'라고 짓궂게 표현했다. 박제가는 실제로 키가 작고 체격이 다부졌다고 전한다.
친구에게서 놀림을 받은 초정은 이에 질세라 화답시를 지었다. 그는 "눈앞에선 화려해도 도무지 형편없나니/ 소인배 옆에 분바른 여인들 비웃으며 보노라"라며 유득공을 '소인배'로 깎아내렸다.
예의를 중시한 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이 서로를 땅딸보와 소인배로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을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지난 19일 학술모임 '문헌과 해석'에서 '해학과 농담의 문사 모임, 18세기 조선의 북학파' 주제 발표를 통해 "조선의 학자와 문인들은 삶의 지향을 유가의 도에 두고 있어 생활과 문학이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무거웠지만, 북학파는 교유와 창작에서 해학과 농담을 즐겼다"고 밝혔다.
북학파는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농업과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정조(재위 1776∼1800) 시대에 실학자로 활약한 박제가, 유득공,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 청장관(靑莊館) 이덕무(1741∼1793)가 대표적인 북학파 문인이다.
안 교수는 "조선시대 지식인의 문학에는 사랑과 농담이 없는데, 한시와 한문 산문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며 "웃음과 농담이 흔히 등장하는 민간문학과는 딴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북학파 문인들은 조선 후기 문인 학자들의 일반적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며 "격식과 예법에 묶이지 않았고, 어린 시절의 친구처럼 놀리고 욕하는 격의 없는 관계에 가까웠다"고 덧붙였다.
북학파 선비들은 지금도 금기시되는 신체 비하 발언을 스스럼없이 했다. 박제가와 청나라를 함께 다녀온 이기원(1745∼?)은 벗인 이희명을 '황새같이 훤칠한 키에 피나 토하는 친구'로 묘사하고, 박제가와 유득공은 '악인연을 맺은 관계'라고 평했다.
이기원은 부여현령으로 부임하는 박제가에게 노골적인 음담패설을 시로 지어 건네기도 했다. 그는 "백성들 정강이에는 계집종 때리던 손을 대지 마소/ 기생들 입술엘랑 청장관 손자 놀라게 하던 수염이나 들이대게"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점잖은 인물로 알려진 청장관 이덕무도 농담을 즐겼다. 이덕무는 강산(薑山) 이서구(1754∼1825)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못난 사람은 단 것에는 사족을 못 쓴다네. 그래서 내 동지들은 단 것만 나오면 내게 주지. 그런데 초정은 인정머리 없이 세 번이나 단 것을 얻고서 나를 생각지도 않았고 주지도 않았네. 친구의 의리란 잘못이 있으면 깨우쳐주는 법이니, 그대가 초정을 단단히 질책해 주기 바라네"라며 초정 박제가를 힐난했다.
이 편지에 대해 안 교수는 "이덕무가 박제가에게 아이처럼 투정한 유희의 글"이라며 "평상시 두 사람이 만나 주고받은 농담과 익살이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북학파 문인들이 이처럼 풍자와 해학을 즐길 수 있었던 데는 경제 사정이 좋아지고 정치적 갈등이 줄어든 시대적 상황이 한몫했다. 물론 개개인의 처지와 취향도 원인이 됐다.
안 교수는 "연암은 과거 응시를 포기했고, 박제가와 유득공, 이덕무는 모두 첩의 자식인 서얼이었다"며 "이들은 관직에 대한 큰 욕심이 없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인생을 즐겁고 경쾌하게 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800년 순조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뒤 조정이 사상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정치도 불안정해졌다"며 "북학파 이후 조선에서는 농담을 즐기는 집단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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