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참말로 좋네/ 푸른길이 있어서 좋네/ 나무들이 서로 모여 살고/ 새들이 그 나무들 속에 집을 짓고/ 아이들이 나비처럼 내려앉은 옛 기찻길/ 광주에는/ 푸른길 푸른 마음 출렁출렁 좋네/ 할머니가 아장아장 손자녀석 등에 업는 길/ 할아버지가 손자 딸 앞세워 소년인 양 걷는 길/ 지어미와 지아비가 늙을 줄 모르고 걷는 길/ 젊은이들이 휘파람 불며 자전거로 달리는 길!"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경전선(慶全線ㆍ삼랑진역∼광주 송정역) 광주 구간 폐선 용지에 조성된 푸른길공원의 '푸른길광장'에는 김준태 시인의 '푸른길을 노래함'이 새겨져 있다. 김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흉물이었던 폐선 용지가 기적 소리 대신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다양한 수목이 늘 쉼 없이 초록을 나눠주는 도심 속 허파로 변신했다.
도심을 관통하는 숲길을 이용해 출근하는 직장인과 통학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가볍고, 숲 속에서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밝다. 공원이 주거지와 맞붙어 있어 슬리퍼를 신고도 찾을 수 있다 해서 '슬리퍼 녹지'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뒷골목처럼 음습했던 기찻길 옆 주택가도 새롭게 단장해 살기 좋은 동네로 다시 태어났다.
조준혁 푸른길 사무국장은 "푸른길공원은 사시사철 꽃도 보고 산책과 운동을 하며 이웃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공원"이라며 "푸른길의 가장 큰 가치는 광주 도심을 감싸며 통과하는 철로가 폐선되자 활용방안을 지자체가 기획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 시민참여형으로 도심 공원을 만든 데 있다"고 말한다.
1922년 개설된 이후 도심을 가로지르던 철도는 교통체증과 교통사고를 유발하고, 소음으로 인한 주민생활 불편 등으로 이설 요구가 이어졌다. 1989년 경전선 구간 중 광주역~효천역 간의 10.8㎞를 도시 외곽으로 이설키로 결정하고 2000년 8월 폐선됐다. 1998년부터 폐선 부지 활용을 두고 지자체와 시민단체의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광주 시장은 폐선 부지의 공원화를 선언했다.
이후 광주시가 예산 책정을 미루자 2002년 민간 차원의 '광주 푸른길 가꾸기 운동본부'가 결성됐다. 2003년 향토기업이 조선대학교 앞 구간을 공원으로 조성해 시에 기탁하고, 시민들도 '푸른길 100만 그루 헌수 운동'에 동참하는 등 시 당국을 압박했다. 시민의 노력으로 2013년 푸른길공원 조성이 완료됐고, 광주시 푸른길 공원 시민참여 관리·운영 조례에 따라 결성된 사단법인 푸른길이 운영을 맡고 있다.
◇ 골목길 걷다 보면 시나브로 추억여행
푸른길공원은 기존 면으로 조성된 도시 숲의 틀을 깬 숲이다. 폐선 철로를 활용해 조성한 탓에 선형을 띠고 있고, 이 때문에 숲이 그대로 걷는 길이 됐다. 숲길의 총 길이는 8.2㎞, 너비 8∼26m, 면적 12만 227㎡인 띠 모양으로 오감길(광주역∼산수동굴다리, 1.7㎞), 배움길(산수동굴다리∼남광주역, 1.7㎞), 물숲길(남광주역∼백운광장, 2.1㎞), 이음길(백운광장∼광주대학교 입구, 2.7㎞) 구간으로 나뉜다.
'오감(五感)길'로 명명된 1구간은 광주역 길 건너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시작한다. 인동덩굴로 장식된 구조물 입구에 들어서면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는 '초록세상'이다. 봄에 연초록 잎사귀를 달고 선 나무들이 진초록으로 어우러졌다가 가을이 되면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사각거리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도심 속 자연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선로 변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기찻길 옆 오막살이는 숲과 조화를 이루며 옛 도심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칙칙폭폭 소리와 함께 살았던 집과 집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지고 벽화가 그려진 골목길을 걷다 보면 시나브로 추억여행이 된다. 선로 변 집들은 다들 문이 철로를 등지고 있었는데 공원 조성 후 문을 공원 쪽으로 내는 등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다.
숲 양편으로 카페와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등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카페 '고양이 낮잠', 폐자재와 쓰레기가 쌓여 있던 곳에 10개의 흰색 튜브를 세운 쉼터 '파빌리온' 등을 만날 수 있다. 털머위, 라벤더, 샤스터 데이지, 상록패랭이, 은쑥, 톱풀 등 다양한 꽃과 풀은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던 시절 무등산에서 지게를 지고 넘어오던 중요한 통행로였던 옛 산수동굴다리를 지나면 승효상의 '광주 비엔날레 폴리 - 푸른길 문화센터'라는 설치미술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원 이름이 동지교인 농장다리는 광주교도소의 재소자들이 농장사역을 하기 위해 건너던 곳으로 이 다리에서 동네로 내려가는 계단과 다리 밑 공간은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푸른길은 복개된 동계천과 푸른길이 만나는 서석교회에서부터 순환도로와 병행한다.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 병원 옆 나지막한 학강고개를 넘으면 과거 남광주역 플랫폼을 재현한 광장과 푸른길공원 방문자센터가 있다. 과거 통학과 통근, 남광주시장을 이용한 서민들의 추억과 애환이 서린 남광주역사는 폐선 직후 뜯겨 아쉬움을 남긴다. 바로 옆 남광주시장에서는 매주 금ㆍ토요일 18시부터 23시까지 야시장이 열린다. 철로 위에 놓인 폐객차 안은 도서관이자 갤러리로 꾸며졌다.
◇ "내 집 앞에서 피톤치드 만끽…도시의 옹달샘"
남강철교의 일부분이 보존돼 있는 광주천을 건넌다. 여기에서 백운광장까지는 곧게 이어지는데 느티나무 가로수길이 따라붙는다. 이곳에는 경전선 선로가 100m 남겨져 있는데 시원한 나무 그늘을 즐길 수 있다.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철길을 걷다 보면 철길 위에 못이나, 작은 쇠붙이를 놔두면 납작하게 변형돼 이를 가지고 장난치며 놀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선로 옆 푸른길 작은 도서관과 백운정을 스치면 백운교차로다. 푸른길 중 단절이 가장 심한 곳으로 3개의 건널목을 건너야 4구간 시작점인 백운광장이다. 이곳에는 사람 발목 높이 정도의 물이 넘실거리는 실개천이 조성돼 있다. 물이 흐르는 실개천 주변에 꽃창포, 노랑어리연꽃, 매자기, 비비추, 부들 등 수질정화 수생식물 18종이 식재돼 있다. 쉼터인 청로정 옆의 '시민참여의 숲'에는 마을 주민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시민들의 '내나무' 명패들과 기업의 참여 표지석들이 어울려 있다.
청로정을 지나 광복촌 마을에 이르면 제법 너른 데가 나오는데 바로 '푸른길 광장'이다. 푸른길 광장에서는 10월 말까지 매월 셋째 주 토요일마다 가요와 팝송, 록 등 밴드 공연을 비롯해 힙합, 재즈댄스, 합창, 버스킹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푸른길은 동성광장을 거쳐 광주대학교 입구인 진월동에서 금당산 숲길로 사라진다.
박병섭 푸른길 도시숲위원장은 "열섬과 폭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도시의 허파로 불리는 도시 숲이 더욱 소중하다"며 "푸른길공원은 내 집 앞에서 피톤치드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도시의 옹달샘"이라고 말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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