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나루 언덕,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 일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초입에 있는 호머 헐버트의 묘비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1886년 스물셋의 나이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미국인 헐버트는 근대식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점차 조선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국권 수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됐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담은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 백악관을 찾았는가 하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고 자신도 헤이그에 가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고서도 일본의 침략적 행위와 잔악한 모습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 그는 살아생전에 입버릇처럼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라고 말하곤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헐버트를 광복절 행사에 국빈 자격으로 참석해 달라고 초청했다. 86세 고령에 지병도 있었으나 행복한 마음으로 한국행 배에 올랐다. 7월29일 한국에 도착한 그는 안타깝게도 여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국에 온 지 1주일 만인 8월5일 서울 청량리위생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유언대로 한국땅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 외국인 묘원에는 헐버트 외에도 미국, 영국, 독일, 덴마크, 러시아, 호주, 프랑스 등 15개국 417명의 외국인이 안장돼 있다. 이중 선교사와 그 가족은 6개국 145명이다.
1890년 고종 27년 6월13일 조선 정부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사망한 외국인들을 안장하기 위해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조성을 허가하고 토지를 제공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양화 나루터를 수비하던 양화진영이 있던 곳으로, 묘지가 설립된 것은 한 달 후인 7월28일이었다.
이곳에 처음으로 매장된 사람은 1885년 6월 의료선교사로 내한, 제중원 원장으로 활동하다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26일 사망한 존 헤론이었다. 이후 양화진은 연세대를 설립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아펜젤러, 이화여대를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배화학당을 세운 조지핀 캠벨, 현대식 병원 세브란스를 건립한 올리버 에이비슨,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고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백정 해방의 아버지' 새뮤얼 무어 등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안식처가 됐다.
선교사들만은 아니었다. 고아를 위해 일생을 바친 소다 가이치는 이곳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어니스트 베델,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도 이곳에 있다.
설립 당시 외국인들은 외국인묘지협회(Foreign Cemetery Association)를 조직하고 외인묘지규칙(Regulations for the Foreign Cemetery)을 제정해 운영했다. 이후 이 묘지는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들의 대표가 묘지기를 두고 관리했으며 1913년 7월 조선총독부 토지대장에 경성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록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구미 외국인들이 철수했고 외국인 소유는 '적산'으로 압류됐다.
해방 후 1946년 10월1일자로 다시 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기가 변경됐고 1985년 6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구미인묘지회로부터 묘지 소유권을 넘겨받아 경내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선교기념관을 세웠다. 1986년 10월10일 선교기념관을 완공한 후 묘역의 명칭도 서울 외국인묘지공원으로 바꿨다. 2005년 7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이 선교기념관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고 이 교회에 묘역과 선교기념관 관리운영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2006년 5월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역의 공식 명칭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으로 변경했다.
양화진은 고려시대 이후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한강을 이용한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 사이로 강물이 출렁거렸던 나루터 양화진은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도 유명했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양화진도'에는 이곳의 수려한 풍경이 잘 그려져 있다.
1866년 초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이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천주교도 8천여명이 처형된 이후 이곳은 순교 성지로 남아 있다.
면적이 1만3천224㎡에 이르는 이 묘원은 1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아름다운 공원의 모습을 갖고 있다. 묘비를 하나하나 둘러보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이방인들의 흔적에 숙연해진다.
산 설고 물선 이곳을 굳이 찾아와서 온갖 난관을 헤치고 헌신한 이방인들. 이들의 마지막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다.
우리는 외국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반이민 정서도 여전하다. 구한말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을 단순히 외세로만 보는 경향도 있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종교적 이해관계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한국 사랑과 한국인들을 위해 이들이 기여한 바를 간과할 수는 없다. 세계가 하나로 되고 국내에서 외국인들이 이웃이 되어가는 시대에 외국인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묘원에 묻힌 이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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