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북양항로' '흰 꽃 만지는 시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오세영(75)과 이기철(74). 반세기 안팎의 시력을 서정 한 길로 써내려온 두 원로 시인이 나란히 신작 시집을 냈다.
오세영의 시집 '북양항로'(민음사)를 펼치면 소년의 천진함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자연과 사물에서 진리를 포착해내는 전통적 서정의 비유를 즐긴다. 앞쪽에 실린 시들이 특히 그렇다. 두세 음절로 된 단어 하나 툭 던져놓고는 시치미 떼듯 또다른 세계를 펼친다.
"먼 하늘 우렛소리 그치고/ 몇 바가지 폭우가 거짓처럼 사라지자/ 밝은 하늘엔/ 빨래 한 벌 내걸린다.// 섬섬옥수 깨끗하게 빤/ 직녀의 그 눈부신/ 색동저고리." ('무지개' 부분)
"신이 화장대에/ 보자기를 풀어 놓자/ 와르르 쏟아져 반짝거리는/ 하늘의 보석들.// 그중 하나가 또르르 구름을 헤치고/ 지상에 굴러떨어지더니/ 일순/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 현란한/ 한순간의 광휘." ('유성' 전문)
시인은 노년을 애써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혹감 속에 허무와 체념이 번갈아 찾아오는 나날이다. 표제작 '북양항로'에서 시인은 항해하는 선박 안에서 석탄을 태우는 늙은 화부(火夫)다. 배는 어디에서 닻을 올렸고 어디를 향해 가는가. 애초에 목적지가 있긴 했나. 시작과 끝은 다를 바 없이 반복된다. 그러므로 허무하다.
"난로의 불빛에 비춰 보는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 ('북양항로' 부분)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아득한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아득한 곳으로 파도가 밀려가는/ 삶이란/ 갯벌 위의 한생,/ 오늘인 어제를 또 미래라 믿지만/ 물이 나자/ 다시 한세상이 시작되고/ 물이 들자 다시/ 한세상이 끝나고." ('갯벌' 부분) 136쪽. 9천원.
이기철은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을 통해 자연과 사물에서 영원성을 찾는 전통적 서정의 시심을 고수한다. "미지에 사로잡힌 영혼을 붙들고 이 시대의 빈혈인 아름다움 몇 포기 꽃 피우려 시간을 쓰다듬으며 시를 썼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가 추구하는 영원성은 미(美)와 맞닿아 있다.
"내게 온 하루에게 새 저고리를 갈아입히면/ 고요의 스란치마에 꽃물이 든다/ 지금 막 나를 떠난 시간과 지금 막 내게로 오는 시간은/ 어디서 만나 그 부신 몸을 섞을까/ 그게 궁금한 풀잎은 귀를 갈고 그걸 아는 돌들은 이마를 반짝인다" ('내가 만지는 영원' 부분)
이기철에게 시인이란 "풀과 꽃에 이름을 지은"('내 정든 계절들') 최초의 사람이다. "언어로 쓴 시 아닌 정서로 쓴 시"('아름다움 한 송이 부쳐 주세요')로써 영원과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시인은 시를 향한 자의식을 곳곳에서 토로한다.
"시 쓰는 일은 나를 조금씩 베어 내는 일/ 면도날로 맨살을 쬐끔씩 깎아 내는 일/ 입천장, 겨드랑이, 사타구니, 항문까지/ 쬐끔씩 발라내는 일/ (…)/ 주검까지 가다가 죽지는 않고/ 절뚝이며 휘청이며 돌아오는 일/ 시 쓰는 일" ('시 쓰는 일' 부분)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이기철 시인에 대해 "우리 시단에 서정시의 기품과 깊이를 지속적으로 부여해 온 대표적인 중진일뿐더러, 근원성을 지향하는 맑고 푸른 위의(威儀)를 이어온 서정의 사제"라고 말했다. 132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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