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허술한 방역체계·축산농 '모럴해저드' 합작품
전문가 "근본적인 방역 시스템 정비 필요"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4월 이후 잦아드는 듯하던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이례적으로 초여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전국 재확산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AI 바이러스는 높은 기온과 습도에 취약해 여름철에는 잘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런 통념이 깨지면서 한국도 중국이나 일부 동남아국처럼 AI가 상시 발생하는 단계가 돼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당국의 허술한 방역체계와 축산 농가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겹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전반적인 방역 시스템의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재확산 비상 걸린 '초여름 AI' 왜 발생했나
통상 AI는 중국 등지에서 한반도로 철새가 들어오는 겨울이나 봄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추운 날씨를 좋아하는 바이러스 특성상 겨울철에는 가금류 체내에 기생하지 않고도 최장 21일까지 생존할 수 있다.
반면 여름철에는 높은 기온이나 습도를 견디지 못하고 사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번에는 철새 이동 시기도 아닌 여름철에 AI가 다시 발생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여름철에 AI가 발생한 적이 있다.
5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이날 고병원성인 것으로 확인된 제주시 이호동 토종닭 농가에서 발생한 AI는 전북 군산의 한 종계 농장에서 판매한 오골계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군산시 서수면의 1만5천여 마리 규모 종계 농장에서 중간유통상 격인 제주 지역의 또다른 농가를 거쳐 해당 농가로 오골계 5마리가 판매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해당 농가의 농장주는 지난달 27일 도내에서 열린 오일장에서 오골계 5마리를 샀다가 이틀 뒤인 29∼30일 사이 5마리가 모두 폐사했는데도 사흘이 지난 6월 2일에야 당국에 신고했다.
공교롭게도 지난달 30일은 농식품부가 '구제역·AI 특별방역대책기간'을 종료하고 6월 1일부터 평시 방역체계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날이다.
시장에서 판매될 때부터 오골계가 AI에 감염된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주 농가의 농장주가 의심 신고를 하기 전까지 최소 6일간은 AI 바이러스가 '자유롭게' 옮겨 다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군산 종계 농장에서는 제주 외에 경기 파주, 경남 양산 등지로도 3천 마리가량의 오골계를 유통한 것으로 파악됐고, 파주, 양산의 해당 농가에서도 잇따라 AI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비록 AI 바이러스가 고온과 습도에 취약하긴 하지만 AI가 상시 발생하는 동남아 등지의 사례로 볼 때 여름철 발생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며 이번 AI의 경우 지난 겨울 창궐했던 바이러스가 잠복해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방역 당국은 AI의 발원지와 이동 경로 등을 찾기 위한 심층 역학 조사를 진행 중이다.
AI 가축방역심의회 위원인 모인필 충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동남아 지역은 아열대 기후인데도 AI가 상시 발생하지 않느냐"며 "여름이라고 AI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 교수는 "이번에 발생한 AI의 경우 바이러스가 어딘가에 잠복해있다가 나타났을 수 있다"며 "하루빨리 방역 시스템을 재정비해 한층 철저한 검역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방역 전담조직 확대·강화해야"
한국은 지난해 8월 세계보건기구(OIE)가 규정한 'AI 청정국' 지위를 확보했다가 같은 해 11월 전남 해남과 충북 음성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하면서 3개월 만에 또 이 지위를 상실했다.
AI 청정국 지위를 회복하려면 최종 살처분 후 3개월간 AI 추가 발생이 없고 바이러스가 순환한 증거도 없다는 점을 입증할 예찰 자료를 국제수역사무국(OIE)에 제출해야 한다.
해남과 음성에서 시작된 AI는 4개월 넘게 전국을 휩쓸면서 닭과 오리를 비롯해 3천만 마리가 넘는 가금류가 살처분되는 등 사상 최악의 피해를 냈다.
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한 3월 중순부터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면서 4월 초 이후로 의심 사례가 추가로 발생하지 않아 7월 초께는 AI 청정국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흘러나왔다.
OIE는 해당국이 최종 살처분 후 3개월간 AI 추가 발생이 없고 바이러스가 순환한 증거도 없는 점을 입증할 예찰 자료를 제출하면 판단을 거쳐 청정국 지위를 부여한다.
AI 청정국이 되면 가금류나 계란 등의 해외 수출이 가능해져 농가 소득 향상에 보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또 다수의 농가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하면서 AI 청정국의 꿈은 한층 멀어지게 됐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일부 동남아국이나 중국처럼 AI 상시 발생국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보였다.
모인필 교수는 "동남아 등 상시 발생국에서는 더운 날씨에도 AI가 발생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제는 우리나라도 동남아나 중국처럼 AI가 상시로 발생하는 국가로 가는 징조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갈수록 토착화하고 강해지는 AI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현재 과 단위로 돼 있는 농식품부의 방역 전담조직을 확대·강화하고 민관이 긴밀히 협력해 더욱 촘촘한 방역활동을 일상화하는 등 근본적인 방역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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