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제62회 현충일 추념사에는 예상을 깬 통합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수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애국'과 '태극기'를 키워드로 국민 통합과 탈이념 정치를 역설한 것이다. 12분간 낭독한 A4 용지 넉 장 분량의 추념사에 애국이란 단어가 22차례나 등장했다. 진보 정부의 대통령이 보수적 분위기가 강한 현충일 추념식에서 이런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뜻밖이다. 정치공학적으로만 보면 중도와 온건 보수로의 확장성을 염두에 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대선 국면에서 보수 세력이 내걸었던 간판 코드가 애국과 태극기다. 문 대통령의 이번 추념사는 그런 의미에서 파격적이었고 대담했으며 신선했다.
문 대통령은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다"면서 "하지만 애국이 모든 시련을 극복했고 지난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면서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없고, 나뉘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한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자 한다"면서 경제에 디딤돌을 놓은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열악한 작업장에서 젊음을 바친 청계천 여성노동자 등도 '애국자'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이 대한민국의 통합에도 앞장서 주시기를 부탁한다"면서 이념 갈등,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 등을 통합 과제로 제시했다.
국민 통합의 길로 '보훈'을 강조한 것도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보훈이야말로 국민 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면서 "국회가 동의하면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세간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런 뒤집힌 현실,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추념사에 인용한 속설은 우리 보훈 정책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구멍이 숭숭 뚫린 보훈 정책과 기관을 이대로 방치하고는 사실 애국이란 말을 입에 담기 어렵다. 최근 공개된 정부조직개편안에는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부처로 격상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문 대통령의 추념사 메시지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성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문 대통령의 추념사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애국이란 절대적 가치를 앞세워 진보와 보수가 함께 가는 '탈이념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런 통합의 정신은 꼭 정치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국민 통합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정치의 탈이념도 의미가 없다.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만 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구상이 우리 현실에 접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이번 주에는 국회 인사청문회로 새 정부의 협치 구도가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특히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기세가 거칠다. 이번 삼일절 추념사가 한국당을 더 자극했을 개연성도 있다. 대통령이 국민 앞에 희망찬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무엇보다 도약을 하려면 먼저 힘을 갖춰야 하고, 발을 디딜 토대도 튼튼히 다져야 한다. 청와대는 하루빨리 정부 구성을 마무리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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