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정부는 비정규직을 과도하게 뽑는 대기업에 고용부담금을 물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6천 원대인 최저임금 시급은 2020년까지 1만 원으로 올릴 방침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실태조사를 거쳐 전환 로드맵을 마련하기로 했다.
경제·사회 시스템을 고용 친화적으로 바꿔 성장-일자리-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다.
새로운 시스템이 가동되면 소득 양극화와 청년 실업난, 가계부채 등 병리 현상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한다.
야성적 충동이 요동치는 시장에는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29년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최악의 위기를 맞았을 때 해결사로 등장한 뉴딜정책이 성공 모델이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실업을 해결해야 한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년) 이론을 바탕으로 뉴딜정책이 만들어졌다.
시장 자율로 경제문제가 해결된다는 자유방임주의에 급제동을 건 케인스는 '거시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지출을 늘려야 기업이 투자하고, 그렇게 되면 고용과 소비도 덩달아 증가한다는 케인스 이론을 미국은 선택했다.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을 것 같던 자본주의가 되살아나자 케인스 이론이 경제학의 대세를 이뤘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나타나자 케인스 위상은 급락했다.
정부가 생산량, 가격, 오염물질 총량, 소비자 안전 등 규제로 시장 자율권이 크게 위축된 탓이다.
이후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다시 주류 경제학 자리를 꿰차게 된다.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 발생한 시장 재앙도 정부의 과도한 개입 때문이다.
혁명을 주도한 로베스피에르(1758~1794년)는 어느 날 '반값 우유' 정책을 발표한다.
생필품 가격 상승으로 고통받는 국민 여론을 의식한 조처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윳값을 내리지 않으면 단두대로 보낸다는 엄포도 놓았다.
그 결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축산 농가들이 젖소 사육을 포기한 것이다.
우윳값을 절반으로 내리면 적자가 불을 보듯 뻔하자 소를 도축해 고기를 내다 팔았다.
젖소가 사라지니 정부 기대와 반대로 우윳값이 폭등했다.
이렇게 되자 건초값을 내리라고 로베스피에르는 명령한다.
농민들이 비싼 건초값을 견디지 못해 폐업한다는 판단에서다.
이 조치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초생산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바람에 건초값이 되레 폭등했다.
건초와 우유 공급이 줄어들자 반값 우유는 오래가지 못하고 예전 가격의 10배까지 치솟았다.
가격 통제 전에 아동들까지 마신 우유를 갓난아이에게도 먹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국민 불만이 들끓으면서 로베스피에르 인기는 추락했고 결국 그는 정적들에게 이끌려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계몽사상 숭배자인 로베스피에르는 독신으로 청빈하게 살며 민생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시장경제에 무지한 탓에 재앙을 자초했다.
중국 대약진운동 당시 약 4천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마오쩌둥(1949~1959)의 오판 때문이다.
국공내전 승리 후 중국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마오쩌둥은 1958년 농공업 증산을 목표로 대약진운동을 추진한다.
농촌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집단 농장화나 농촌 철강 생산 등이 주요 정책이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켜 10년 안에 중국 위상을 미국이나 소련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욕심에서 엉터리 정책을 마구잡이로 내놓았다.
그런데도 반대 의견은 거의 없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대약진운동의 부작용을 예측했지만, 모두 침묵했다. 탄압을 우려한 탓이다.
공산당 핵심 실세이던 팽더화이조차 어렵사리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숙청된 것도 반론을 막은 이유다.
마오쩌둥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토법고로' 정책은 시행하자마자 문제투성이로 드러난다.
전통기술(토법)로 만든 작은 용광로(고로)에서 농민이 강철을 직접 생산하자는 운동이다.
철강 대량 생산에 필요한 최신 용광로를 사들일 자본과 운영 기술이 없으니 인해전술로 미국이나 소련을 따라잡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이 운동에는 농민 9천만여 명이 동원된다.
강철 생산 경험이 없는 이들은 철광석이나 석탄을 어디서 구하는지조차 몰랐다.
허둥지둥 헤맨 끝에 고철을 주워다 용광로에 넣어 강철을 생산했다.
할당량을 채우려고 멀쩡한 농기구와 트랙터 같은 농기계도 용광로에 집어넣는다.
강철 생산을 늘려 최신 농기구를 보급하려던 토법고로 운동이 정반대 결과를 빚었다.
집에서 쓰던 식기류와 양철지붕도 용광로에서 녹아내렸다.
용광로 연료로 쓰려고 산천과 과수원 나무까지 벌목한 탓에 산사태가 빈발해 농경지를 망쳤다.
마오쩌둥은 참새 박멸도 지시한다.
농촌을 시찰하다가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는 모습을 보고 참새를 없애야 식량을 증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중국 최고 실력자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대륙 전역에서 대대적인 참새 소탕작전이 이뤄진다.
어른은 물론, 아이까지 새총을 들고 다니며 참새를 쏘아 죽이는 일에 동원된다.
그 덕분에 1년 동안 참새 약 2억1천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곡식 낟알을 쪼아 먹는 새가 사라진 후 농촌에서는 재앙이 발생한다.
천적 참새가 없어진 틈을 타 해충이 대량으로 번식해 곡식을 갉아먹은 탓에 희대의 흉작을 맞았다.
농업에 문외한인 마오쩌둥이 벼를 빽빽하게 심도록 지시한 것도 패착이었다.
모와 모 간격을 최대한 줄이면 소출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믿고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
모는 최소 간격 이하로 좁혀 심으면 서로 생장을 방해하면서 병충해에 취약해지고 낟알이 줄어든다.
절대 권력자가 즉흥적으로 내놓은 식량 증산 계획은 대실패로 끝난다.
이 때문에 굶어 죽은 사람이 1천만 명을 넘은 것으로 발표됐다. 실제 사망자는 최대 4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차 대전 당시 최대 인명 피해를 본 소련 사망자 2천만 명보다 두 배나 많은 수치다.
대약진운동 시작 단계부터 나타난 수많은 실패 징후를 마오쩌둥은 감지하지 못했다.
협동농장이나 공장 등에서 질책을 피하려고 허위 보고를 일삼은 탓이다.
엉터리 통계수치가 난무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뒤늦게 문제점을 깨닫고 소련 연해주 참새 20만 마리를 수입했으나 들녘을 휩쓴 해충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굶주림으로 숨지자 마오쩌둥은 1962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난다.
그 후에도 식량이 늘 모자라 배급제를 운용하고 부족분은 수입하는 방식으로 근근이 지탱했다.
덩샤오핑이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정계에 복귀하고서 추진한 개혁개방정책이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비로소 만성적인 식량난을 완전히 해결하게 된다.
흰 고양이나 검은 고양이나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다는 백묘흑묘론과 남쪽 기슭이든 북쪽 기슭이든 정상으로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남파북파론이 개혁개방의 성공 비결이다.
유연한 실용주의노선이 중국 인민을 기아에서 구해낸 것이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3일 일자리와 양극화 문제가 재난 수준이라면서, 일자리 정책을 정권 5년 내내 챙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경제 회복을 위해 정부 곳간을 더 풀고 일자리와 가계 소득을 늘려 경제성장을 견인하겠다는 'J노믹스'(문재인 경제비전)의 일환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시장질서 교란, 비정규직 양산 등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판단에서 J노믹스는 나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도 정부 돈을 쏟아부어 경제활력 마중물로 삼았다.
다만, 단기 성과를 내려고 과속하다 보면 돌발 악재를 맞는다는 점에서 J노믹스 로드맵은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정책 성패는 촘촘한 디테일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다가 참사를 겪은 로베스피에르나 마오쩌둥보다는 실사구시로 무장한 덩샤오핑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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