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백마부대원 김일용 옹 "산화한 전우 552명 잊지 않을 것"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65년간 내 몸속에 파편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지…. 훈장 아닌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거주하는 김일용(84) 옹은 지난해 여행 중 발목 골절로 병원을 찾았다가 의사로부터 의외의 소견을 들었다.
엑스레이(X-ray) 검진결과 가로 8㎜, 세로 6㎜, 두께 2.2㎜ 크기의 쇳조각이 명치 부위 몸 안쪽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이 부위에 불편함을 느껴왔던 그는 '어떻게 가슴안에 쇳조각이 들어갔나' 하고 궁금해하던 중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떠올리며 쇳조각의 정체를 짐작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그는 적진에 파견돼 첩보를 수집하거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산하 8240부대(일명 켈로부대·Korea Liaison Office)의 부대원이었다.
그는 9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된 뒤 북측에 대항하는 비정규군에 입대했다. 당시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며 "같은 해 비정규군이 켈로부대에 편입되면서 북한 섬 지역인 평안북도 철산군 대화도에서 수색·연락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내 나이가 고작 17세였다"고 회상했다.
켈로부대는 1949년 미군이 창설한 미 극동사령부 산하 특수부대로 부대원들이 모두 이북(한반도 북위 38도 선 위쪽 지역) 출신으로 구성됐다.
이 부대는 1950년 9월 14일 인천 팔미도를 탈환해 그곳에 있던 등대를 밝혀 다음날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개시하도록 발판을 마련하면서 훗날 명성을 얻었다.
연합군의 함정은 팔미도 등대 불빛을 따라 무사히 인천항에 들어왔으며 상륙한 연합군은 북한군의 물자보급을 차단하고 낙동강에서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서울을 탈환하면서 북진(北進)에도 나설 수 있었다.
그는 "북한 대화도에서 작전을 수행한 우리 부대의 별칭은 '유격백마(遊擊白馬)'였다. 우리가 수집한 북측의 정보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는 데 활용됐다"며 "그러나 1년 뒤 중공군의 역습이 감행됐다. 우리는 폭격을 피해 대화도를 빠져나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후퇴하던 중 날아든 포탄이 터지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아군의 선박을 탔다"며 "몸에 박혀 있는 쇳조각은 포탄 파편인 것 같다. 그때는 몸이 피투성인 데다 상처를 살필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그동안 명치가 욱신거릴 때마다 소화제와 진통제를 먹으며 통증을 진정시켰다. 66년간 큰 탈이 없었던 만큼 파편 제거수술은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의사도 수술을 권유하지 않았다.
그는 이날 인천시 중구 을왕동 충혼탑 앞에서 열린 '제66주기 유격백마부대 전몰용사 위령제'에 참석해 6·25전쟁에서 산화한 전우 552명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아직도 국가의 온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는 백마부대 동지·가족들이 많다. 정부와 국가보훈처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며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다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tomato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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