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권 "내가 가짜로 연기할까봐 늘 걱정…진짜를 추구"

입력 2017-06-11 10:00   수정 2017-06-11 10:22

박혁권 "내가 가짜로 연기할까봐 늘 걱정…진짜를 추구"

SBS '초인가족' 5개월 끌고오며 큰 웃음…"항상 사람들을 관찰"

"남들은 날 특이하다고 하지만 난 동의 못해"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예전에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 아시죠? 그거 보면 출연자들이 한 줄로 서서 앞사람이 말한 단어를 입 모양만 보고 뒷사람에게 전해주는 게임이 있어요. 그거 하다 보면 '사자'를 말했는데 끝에 가서 '원숭이'가 되고는 하잖아요? 저는 제 연기가 그렇게 될까 봐 늘 걱정이에요. '사자'를 그려야 하는데 '원숭이'를 그릴까 봐요."

언뜻 농담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우 진지했다. 슬렁슬렁 가볍게 툭 내뱉은 것 같지만 배우로서의 묵직한 고민을 진솔하게 토로한 것이었다.

이게 바로 배우 박혁권(46)의 스타일이다.

SBS TV 월요 드라마 '초인가족'을 지난 5개월간 끌고 온 그를 최근 광화문에서 만났다. 40부작으로 기획돼, 이제 8부 능선을 넘은 '초인가족'에서 박혁권은 극의 70% 이상을 책임지며 큰 웃음과 따뜻함을 선사했다.






◇ 박혁권이 창조한 또 하나의 캐릭터 '나천일'

'초인가족'의 주인공 '나천일'은 깡촌 출신, 주류회사의 만년 과장이다. 소심하면서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고 철도 없다. 눈치도 없고, 딸이 다니는 중학교 앞 '바바리맨'으로 몰리는 등 종종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박혁권은 그러한 소시민 '나천일'을 지금 내 옆에 있는 누군가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 '연민'과 '공감'이라는 열쇳말에 실어서.

"나천일 연기하는 게 되게 재미있었어요. 현실에 존재할 만한 인물이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우리가 사람을 보면 진짜 멋진 사람인지, 멋진 척하는 사람인지 알잖아요? 나천일은 멋진 척을 안 해서 좋아요. 또 '척'을 하려고 해도 매번 다 들키죠. 하지만 그런 나천일도 초인이죠. 드라마의 제목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초인이라고 생각해요. 그 초인들이 모여서 이번에 (촛불시위로) 큰일도 해냈잖아요?(웃음)"





'밀회' 강준형, '펀치' 조강재, '프로듀사' 김태호, 육룡이 나르샤' 길태미'는 모두 박혁권의 섬세한 손길이 빚어낸 명 캐릭터다. '초인가족'의 나천일은 이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인 최신작이자, 박혁권이 TV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맡은 주인공 캐릭터다. 덕분에 시청자는 너무 자연스러워 저절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박혁권 표 연기를 풍성하게 맛볼 수 있었다.

"대본이 정말 좋았어요. 진영 작가님이 정말 다양하고 폭넓은 이야기를 다뤘고 진짜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펼쳐졌어요. 그러면서 사회적 이슈도 건드려줬고요. 엄효섭 선배님이랑도 얘기했는데, 작가님이 다음에 미니시리즈를 쓰면 잘 쓸 것 같아요."

박혁권은 여러 에피소드 중 '취준생' 동생이 나천일의 집에 잠시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던 일, 나천일 부부가 동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일, 나천일의 첫사랑이 쓸쓸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일, 나천일 회사에서 명퇴 신청을 받으면서 벌어진 일 등을 기억에 남는 이야기로 꼽았다.

"사실 좀 더 웃길 수 있었는데 그걸 다 하지 못해 아쉬운 면도 있어요. 웃음 면에서는 50% 정도만 보여드린 것 같아요. 그 대신 따뜻한 가족 드라마가 됐으니 만족해야죠. 동생이 눈칫밥을 먹던 에피소드가 참 기억에 남는데, 동생 역의 배유람 씨를 제가 추천했어요. 뜯어보면 저랑 닮지 않았지만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 추천했는데 연기가 너무 좋았죠. 아내 역의 박선영 씨, 딸 역의 김지민과도 앙상블이 참 좋았습니다."

박혁권은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싱글이다. '초인가족'에서 알콩달콩 가정을 이루며 살아갔으니 결혼 생각이 더 나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주변에서 실제로 가정을 이뤄 아빠가 되고 싶지 않냐고 묻던데, 저는 결혼을 더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웃음) 혼자 오래 살다 보니 공간적, 시간적인 면 등에서 결혼을 하면 답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아직은 같이 놀아줄 친구들이 많아서 별로 외로움을 못 느껴요."






◇ "연기의 미각 둔해질까 걱정"

박혁권은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긴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버스도 혼자서 타보고, 동네에서 목공수업도 듣는다.

"저는 평소 다른 드라마나 영화를 잘 안 봐요. 대신 사람들을 만나죠. 어차피 연기는 가짜지만, 가짜를 보면서 가짜 흉내를 내느니 진짜를 보고 흉내를 내자 싶은 거죠. 사람들을 만나 술 마시고 이야기를 하면서 '진짜'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을 좋아해요. 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직접 다 해보려고 하고요. 최대한 진짜를 보여주고 싶은 거죠."

그런 확실한 가치관으로 인해 그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연기 같은 연기'가 나오면 관람을 멈춘다고 한다.

"저의 병적인 부분이죠. 하지만 제가 보면서 '세상에 저런 사람이 어딨어?'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싶은 대목이 나오면 더는 못 보겠는 거에요. 특히 독백, 혼잣말을 길게 하는 거 못 보겠어요.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길게 할까요? 저는 혼잣말이 7음절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10음절 이상이 되면 못하겠다고 하고요.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은 저랑 영화 보는 거 피곤해 해요.(웃음)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연기는 못 봐주겠어요."







그런 그가 배우들의 연기에 반해 최근 3번 본 작품이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 보셨어요? 저는 '얘네 미쳤구나' 하면서 3번 봤어요. 정말 연기가 너무 자연스럽더라고요. 저는 유머도 이창동 감독님 식의 유머가 좋아요.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너무 웃긴 거 있잖아요. 관성적인 거, 관습적인 거는 너무 싫어요. 이런 제가 대놓고 거짓말(연기)을 하게 될까 봐 늘 걱정입니다. 연기의 미각이 둔해지지 않을까 걱정돼요. 그러지 않기 위해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관찰하려고 하죠. 광화문 촛불시위에도 자주 나갔어요. 마스크를 쓰고 나갔더니 못 알아보시더라고요.(웃음)"

그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017로 시작되는 휴대전화 번호를 아직도 쓰고, 사진 찍기를 '너무' 싫어하며, 조금의 '가짜'도 못 참는다.

"저보고 특이하다고들 하더라고요. 저는 동의할 수 없지만.(웃음)"

그런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다음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 기대된다.

prett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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