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올 사이로 '천오백년' 시간의 바람이 솔솔
(서천=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김말봉 작시의 가곡 '그네'가 한결 친근하게 다가오는 때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시원한 모시옷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충남 서천의 한산모시문화제는 1천500년 역사의 모시를 소재로 한 향토축제.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짜인 올해 축제는 모시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며 이른 더위를 상큼하게 식혀줬다.
모시문화제 이틀째인 6월 10일 오후 한산면 건지산 자락의 한산모시관 앞. 드넓은 야외잔디마당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채 기다란 줄에 매달린 오방색 태모시들이 건듯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거린다. 이에 화답하듯 바로 옆에 놓인 화분들의 푸른 모시풀잎도 팔랑팔랑 춤추고, 창공을 나울나울 날아가는 나비들 역시 부드러운 날갯짓으로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한껏 찬미한다.
청명한 하늘에서 막 내려온 선남선녀들인가. 저마다 곱고 아리따운 모시한복을 각양각색으로 차려입은 전문모델들이 경쾌한 음향에 맞추어 잔디마당 주무대 위를 사뿐사뿐 거닌다. 우아한 전통 모시와 세련된 현대 패션이 한데 어울려 연출하는 조화의 무대. 제 흥에 겨웠는지 객석에서 바라보던 한 어린이가 꽃을 든 채 풀밭 위를 덩달아 사뿐사뿐 걷는다. 아이의 깜찍하고 귀여운 코스프레 연기에 객석은 웃음으로 넘쳐난다.
"패션쇼여서 더 그럴까요? 모시옷의 색깔이 정말 아름다워요! 디자인도 생각보다 다양하고요. 올여름엔 모시옷을 꼭 입어보렵니다." 모시축제에 처음 참가했다는 블로그 기자단의 이은경(49·대전) 씨는 모시옷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축제 첫날부터 스카프 만들기 체험을 해봤다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모시 본고장서 열리는 전통섬유축제
한산모시의 역사와 우수성을 체험하는 제28회 한산모시문화제가 지난 6월 9일부터 12일까지 '천오백년을 이어온 한산모시의 바람'이라는 주제로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한산모시관 일원에서 열렸다.
한산모시는 1천500년 역사를 지닌 대표적 전통천연섬유. 서천의 한산은 그 최적의 재배지로 명성이 높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데 이어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모시야, 여름을 부탁해!'라는 슬로건을 내건 올해 축제는 한산모시의 특징을 '어머니의 바람' '시원한 바람' '트렌드의 바람'으로 표현한 가운데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들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축제의 핵심인 저산팔읍길쌈놀이를 비롯해 한산모시 패션쇼, 한산모시 맛자랑경연대회, 한산모시 잠자리사수대회, 한산모시 전국가요제 등 굵직한 프로그램이 방문객들을 사로잡았다. 이와 함께 전통모시학교, 모시옷 입기 등 체험 거리가 다양했다.
모시는 과연 뭘까? 한산이 그 본향이 된 배경도 궁금하다. 축제장의 한산모시 홍보관과 전시관에서는 모시의 역사와 제작과정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한산모시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길다. 한 노인이 건지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유달리 깨끗한 풀이 있어 껍질을 벗겨 보니 그 껍질이 늘씬하고 보들보들해 실을 뽑아 베로 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한산 세모시는 품질이 우수해 조선조에 궁중 진상품으로도 사용됐다. 세(細)모시는 말 그대로 올이 무척 섬세하고 결 또한 매우 곱다. 가볍고 투명한 것이 꼭 잠자리 날개 같다고 해서 '잠자리 속날개'로 불리기도 했다. 올해 축제에 잠자리사수대회 프로그램이 처음 도입된 내력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자리'는 곤충의 잠자리와 잠자는 자리라는 뜻의 잠자리가 중의적으로 사용됐다.
한산을 중심으로 한 서천이 모시로 유명해진 데는 모시풀의 성장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쐐기풀과의 다년생 식물인 모시풀은 생육 특성상 기온이 영하 15도 이하로 내려가면 뿌리가 얼고 서리에도 약하다. 반면 여름철 기온은 평균 20~24도로 높고, 연 강우량도 1천mm 이상 돼야 하는 등 습기가 많아야 한다. 이런 여건을 잘 갖춘 최적지가 바로 서천의 한산 일대다.
한산모시조합 임은순 대표는 "질감이 까슬까슬하고 가벼운 모시는 무더운 여름날에 입으면 살갗에 닿기만 해도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이 든다"면서 "다른 섬유에 비해 통풍성이 뛰어나고 습기의 흡수력과 발산속도가 빠른 데다 입을수록 윤기가 들고 내구성 또한 좋다"고 예찬론을 편다.
◇ 한 올 한 올에 녹아든 인고의 미덕
한 벌의 모시옷이 탄생하려면 모시 수확에서 겉껍질 훑기, 태모시 만들기, 모시 삼기, 모시 날기, 바디 쓰기, 모시 매기, 모시 짜기에 이르기까지 명칭조차 낯선 직조 과정을 복잡다단하게 거쳐야 한다. 서민 아낙네들은 이런 인고의 작업을 밤낮없이 수공으로 감당했다. 그사이 입술이 부르트고, 손가락이 갈라지고, 허벅지는 헤지기 마련이다. 일평생 감내해야 했던 모시 작업에는 여인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모시전시관 앞의 전통모시마당에서 진행된 길쌈 시연과 전통모시학교 수업은 이 같은 모시옷 제작과정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자리였다. 길쌈 시연의 경우 서천 지역에 살며 평생 모시 작업을 해온 할머니 20여 명이 참가해 지극정성의 모시 만들기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줬다.
이중 최고령자는 기산면의 나정희(91) 할머니. 나 할머니는 "그 옛날부터 학교도 못 다니고 모시 일을 하며 농사도 짓고 그랬어. 관람객들에게 모시베 만드는 과정을 이렇게 보여주니 사는 보람이 있네"라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옆 자리의 고애순(82·기산면) 할머니도 "어렸을 때 어른들이 모시 짜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해보고 싶었다구. 아홉 살 때 어른들 몰래 숨어서 배워 이날 이때까지 해왔지"라며 해맑게 웃었다.
◇ '이골 난다' 표현 낳은 모시짜기
인근의 모시학교도 삼삼오오 마주앉아 모시를 째고, 삼고, 짜는 과정을 체험하는 사람들로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다. 충남 보령에서 가족과 함께 온 한종만(52) 씨는 "어려서 가마니나 새끼 짜는 모습만 봤지 모시는 아예 모르고 살았다"면서 "모시 만지는 것 자체가 처음인데 해보니 정말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네요. '이골이 난다'는 말이 모시짜기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어요"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이골이 난다'는 말은 '아주 길이 잘 들어서 몸에 푹 밴 버릇'을 뜻한다. 어떤 방면에 아주 익숙해졌다는 의미. 아낙네들은 모시째기를 이빨로 물어서 했는데, 이를 반복하면 어느 순간에 이빨에 골이 생겨 이후부터는 그 골로 쉽게 모시를 쨀 수 있다고 해 '이골이 난다'고 했다. '넌더리가 난다'거나 '지긋지긋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알기 쉽지만 본디의 뜻은 그게 아닌 것이다
한삼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73) 할머니는 "모시베 하나가 태어나기까지 무려 4천 번의 섬세한 손길이 간다고 할 만큼 지극정성이 필요하다"고 들려준다. 2000년에 기능보유자가 된 방 씨는 "어려서부터 어르신들이 한 방에 모여 앉아 모시 삼는 모습을 보며 자랐지만 스물아홉 살 때 기산면에서 한산면으로 시집오면서 본격적으로 모시 일을 하기 시작해 40여 년 동안 모시와 함께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 새 놀이문화로의 변신 '저산팔읍길쌈놀이'
"하늘에다 베틀 놓고/ 구름 잡아 잉아 걸고/ 올공졸공 짜노라니/ 조그마한 시누이가/ 그 베 짜서 뭐 할라요/ 서울 가신 자네 오빠/ 강남도포 해줄라네"
태평소와 사물악기의 신명나는 연주 속에 120여 명으로 구성된 저산팔읍길쌈놀이단이 축제 주무대가 있는 거리공연장에 나와 놀이판을 벌인다. 백의민족의 후예답게 하얀 치마와 저고리, 역시 하얀 바지와 웃옷을 걸쳐 입은 길쌈놀이단은 여덟 개의 모시베틀을 각기 앞세운 채 등장해 모시 만드는 장면을 차례로 연출했다.
"추야공산 긴긴 밤을/ 쩐지 바탕 마주보며/ 무릎 비벼 삼은 모시/ 서울님을 줄 것인가/ 오동잎이 울어댈 때/ 감골낭군 줄 것인가/ 편지 왔네 편지 왔네/ 강남낭군 편지 왔네"
충남 무형문화재 제13호인 저산팔읍길쌈놀이는 서천의 8개 읍면에서 전승돼오던 여성 중심의 길쌈노래를 놀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모시를 짜면서 동작 없이 단조롭게 흥얼거리던 토착민요를 각색해 새로운 놀이문화로 만들었다.
'저산(苧山)'은 '모시가 나는 고장'이라는 뜻. '팔읍'은 모시가 많이 생산돼온 한산·서천·비인·남포·주포·임천·홍산·정산 등을 일컫는다. 이들 읍면 거주자로 구성된 놀이단은 모시 벗기기에서 모기 삼기, 모시 꾸리기, 모시 매기, 모시 짜기 등의 모시작업 전 과정을 곡조와 사설로 재구성해 보여줬다. 축제기간에 모두 여섯 차례의 시연이 이뤄졌지만 고령의 출연자들은 지친 기색 없이 흥겨운 잔치마당을 연출해 감탄을 자아냈다.
베틀의 바디를 부지런히 당기며 모시를 짜던 남순자(72·남포면) 할머니는 "젊어서 참 많이도 짰지. 나이 먹은 지금도 잘 돼. 힘드냐구? 하나도 안 힘들어!"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걷기가 힘들어 휠체어에 앉아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는 권금순(80·한산면) 할머니도 "옛날 생각이 많이 나! 축제 때만 되면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까!"라며 사뭇 감격어린 얼굴이었다.
드디어 각 읍면 대표의 경연 결과가 발표됐다. 길쌈놀이 총지휘자는 시연작품에 대한 총평을 곁들였다.
"남포 모시는 성글고, 보령 모시는 척이 짧고…(중략)… 비인 모시는 폭이 좁고, 보름새로 짠 한산 모시가 오늘의 장원입니다! 장원팀을 위해 즐겁게 놀아주세요!"
길쌈놀이단은 일제히 한산면 대표를 가마 위에 올려놓고서 덩실덩실 춤추며 흥겨운 놀이판을 벌였다. 승패, 지역, 남녀, 노소, 신분을 초월해 모두 하나가 되는 어울림의 대동 마당이었다. 공연단과 관람객들도 한 덩어리로 신나게 놀이에 빠져들었다.
경기도 평택에 거주한다는 미군 가족 샌드라 키스트(66) 씨는 "한국에서 살면서 처음 보는 공연"이라면서 "주민들이 함께 연출하고 모두가 즐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울에서 온 관람객 김현정(30) 씨는 "모시를 모르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생활 속에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고 밝게 웃었다.
◇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모시 음식
전문모델의 '한산모시 글로벌 패션쇼'에 앞서 주무대에서는 서천 거주자들이 개인 또는 가족 단위로 직접 나서 연출한 '한산모시 주민모델 패션쇼'가 진행됐다. 순수 아마추어 출연자로 무대에 오른 이들은 지역의 대표상품을 알린다는 자긍심 덕분인지 전문모델 못지않은 감동을 안겨줬다.
금색 치마와 저고리 차림의 남영자(67·문산면) 씨는 "무대에 서는 게 처음이라 무척 떨린다"면서도 "제가 직접 짜서 만든 옷을 입고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고 활짝 웃었다. 인디핑크의 상하복과 빨간 원피스를 차려입은 한산면의 김동하(8)·연희(4) 남매는 손 잡고 나란히 무대에 올라 두 손가락으로 'V'자와 토끼 귀 모양을 깜찍하게 연출해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건너편의 보조무대에서 진행된 한산모시 맛자랑경연대회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모시 음식과 음료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다. 모시떡, 모시차, 모시 돈까스 외에 모시 타락죽, 모시 냉칼국수, 모시 피자 등이 새롭게 선보였다. 이번 대회 본선에는 모두 15개 팀의 50개 요리가 출품돼 경쟁을 벌였다.
올해 문화제는 신규 프로그램이 풍성하고 날씨까지 쾌청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축제 기간에 다녀간 방문객은 28만 명(주최 측 집계)에 달했다.
노박래 서천군수는 "우리 조상의 얼과 전통이 담긴 한산모시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한산모시를 알리고 전승하는 것이 문화제의 중요한 역할"이라며 "이 축제를 한산모시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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