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인생플랜]④ 순간 몰락 있었지만 좌절은 없었다

입력 2017-06-25 09:00   수정 2017-07-17 14:50

[100세 시대 인생플랜]④ 순간 몰락 있었지만 좌절은 없었다

대기업 임원→컨설턴트→교수→작가→커피 농부로 변신 김영한씨

"인생엔 들고 날 때가 있지만, 은퇴할 때는 없다"

(서귀포=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삼성전자 임원, 마케팅 컨설턴트, 경영대학원 교수, 베스트셀러 작가, 커피 농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커피연구소 대표 김영한(70)씨가 걸어온 흔치 않은 인생 경로다. 인생 100세 시대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읽어 미래를 준비하고 흔들림 없이 도전해 목표를 성취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김씨는 1976년 과장으로 삼성전자 컴퓨터 사업부에 입사했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IT기업 가운데 하나로 성장한 삼성전자가 컴퓨터 분야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마케팅을 담당했던 김씨는 "1983년 삼성전자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PC) SPC-1000이 내 첫 작품이었다"고 회상했다.

SPC-1000은 기대에 못 미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비싼 가격도 판매의 걸림돌이었지만 일반인에게 PC란 그저 생소한 미래의 기계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컴퓨터가 미래산업의 중심이라 해도 3년 연속 적자가 나면 사업을 접겠다"고 말하던 터라 그는 조바심이 났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85년, 그는 '한국형 컴퓨터'라는 콘셉트로 PC 한글화, 국산화를 강조해 삼성전자 최초의 IBM 호환 PC인 SPC-3000을 시장에 내놓았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부실하게 만들었던 PC 제작 금형까지 다시 만들 정도였다. SPC-3000의 성공을 바탕으로 컴퓨터 사업부의 PC 사업은 흑자로 전환됐다.

이후 그의 직장생활은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고민했다. "잘 나갈 때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이 마흔이 되던 해인 1988년 과감하게 컴퓨터 사업부 이사직을 내던졌다.

그는 사람이 떠나는 적절한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내리막길에서 떠밀리듯 직장을 떠나면 자존감을 잃고, 패배감에 지배당하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퇴사 후 마케팅 전문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성전자 출신 컨설턴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클라이언트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최고 마케팅 컨설턴트로 이름을 날렸다.

잘 나가던 컨설팅 사업은 1997년 외환위기가 몰고 온 후폭풍에 풍비박산됐다. 1998년 거의 1년간 수입이 없는 상태가 지속됐고, 결국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당시 고교생이던 자녀 둘, 부인과 함께 서울의 한 산동네 단칸방을 전전했다.

순간의 몰락이었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신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며 재기를 꿈꿨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총각이 운영하는 야채 가게가 극심한 불황에도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기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암흑 같은 'IMF 시절' 젊은 야채 장사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1998년 3월 17일 무작정 대치동 야채 가게를 찾았다. 정말 손님들이 줄을 서서 배추를 사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객을 끌어오는 저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하고 고민하던 그는 총각 이영석씨에게 "당신의 성공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며 도와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매일 저녁밥을 사며 이씨의 경험담을 듣고, 함께 도매시장을 다니며 총각의 노하우를 책에 옮겼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이 30만 부 가량 팔린 베스트셀러 '총각네 야채가게'다.

그는 '총각네 야채가게'에서 '파이팅 스피릿'을 배웠다. 물러서지 않는 싸움이 승리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총각네 야채가게'를 통해 불굴의 정신을 배웠고, 함께 따라온 수억원의 인세는 그가 다시 일어서는 재정적 바탕이 됐다.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자 출판사의 '콜'이 줄을 이었다.

'스타벅스 감성마케팅' 등 지금까지 그가 쓴 책은 총 60여 권이다. 강연과 컨설팅 의뢰가 다시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60세에 가까워지자 책도 잘 팔리지 않고, 강연 요청이나 컨설팅 의뢰도 차츰 줄었다.

그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디지털 사회에서의 경쟁은 더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날로그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 나이와 상관없이 일할 새로운 분야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으로 주목을 받던 제주도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2011년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제주에서 찾기로 하고 가족 반대에도 홀연히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내려왔다.

인생 3모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2012년 처음 제주에서 벌인 사업은 웨딩 사진관이었다.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다시 '씨앤블루'라는 카페를 차렸다. 당시 제주엔 지금처럼 카페가 많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사업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해 실패하게 됐다는 생각으로 커피 공부에 몰두했다. 수입한 원두를 가공해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데 멈추지 않았다.


커피와 관련한 원천기술 확보에 집중했다. 커피의 원천기술은 커피나무 재배라 생각했다. 2천200㎡ 규모 비닐하우스를 지어 여러 종류의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커피의 새로운 가치에 주목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통해 관련 서적을 구입해 독학하며 커피 잎과 열매의 각 부분의 유용한 성분까지 분석했다. 유익한 성분이 가득한 커피의 잎과 열매의 껍질을 재료로 차까지 만들었다. 의미는 있었지만, 맛이 떨어져 사업화는 하지 못했다.

제주도에 맞는 커피 생두 생산도 시도해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토속 발효식품인 '쉰다리'에서 영감을 얻어 생두를 발효시켜 '제주 몬순 커피'도 개발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커피 열매껍질에 많이 들어있는 당분을 활용해 제주대 연구팀과 함께 커피와인도 개발해 특허까지 냈다.

그런데 커피와인 시판의 전제가 되는 주류제조허가라는 암초를 만났다. 연구개발에 돈은 계속 들어갔고, 카페를 통해 번 돈은 모두 커피연구소에 들어갔다.

"왜 그렇게 사서 고생하냐"라는 가족들의 타박도 심해졌다.

빚어놓은 와인을 팔지 못하게 되자 커피를 활용한 화장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기존 화장품 시장 장벽은 높았다. 압박은 계속됐다.

주류제조업체 식약청 허가를 우회하기 위해 커피 생두를 이용한 와인 개발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커피 생두 와인이 탄생했다.

그의 연구소 작업실엔 오크통에 든 커피 생두 와인이 병입 과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5년간 연구 끝에 얻어낸 결실은 이달 21∼24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BEXCO·부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국제식품대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김씨는 아직도 목이 마르다.

100세 시대, 어림잡아 30년 남은 그의 인생을 또 어떤 도전이 채우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그의 사전엔 은퇴란 말이 없다.

jihopar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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