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민 명지대 교수, '한양읽기 도성'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도성은 백성이 피와 땀을 바쳐 지은 건축물이에요. 가을걷이가 끝나면 붙잡혀와서 이듬해 봄까지 노역을 했죠. 이들에게 한양도성은 증오의 대상이었겠죠. 하지만 성이 완성된 뒤에는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서울의 상징이 됐습니다."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한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시대에 한양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궁궐도 종묘도 아닌 도성이었다"면서 "조선의 명목상 주인은 임금이었지만, 한양도성은 백성의 노고가 맺어낸 결정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최근 '한양읽기 도성'(눌와 펴냄)을 출간했다. 이 책은 1398년 완성된 18.6㎞ 길이의 한양도성을 '건축'이 아닌 '사람'의 관점으로 들여다본 것이 특징이다. 도성을 짓고, 관리하고, 이용한 수많은 선조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일례가 중구 국립극장에서 남산 정상으로 뻗은 도성에 새겨진 각자(刻字)인 '안이토리'(安二土里)에 담긴 애사다. 홍 교수는 '승정원일기' 숙종 37년(1711) 4월 8일자에서 안이토리가 도성의 광희문을 공사하다 돌에 깔려 사망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안이토리는 평범한 석수였지만, 왕실의 공식 기록물과 도성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양반 관료들은 안이토리 같은 이름을 안 짓죠. 우리말로 '이돌'인데, 한자로 적다 보니 '이토리'가 된 것인지도 몰라요. 도성에는 각자가 300개 정도 있습니다. 저마다 절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요."
홍 교수는 도성을 건설한 주체가 백성이라면 도성을 관리한 사람은 왕이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양도성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면 왕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선조와 인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도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 것에 대해 "국가의 신뢰를 무너뜨린 행위"라고 평가했다. 이로 인해 백성은 임금도, 관료도 믿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안정되자 숙종은 도성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하지만 숙종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가운데 어느 쪽에 치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반면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한양도성을 보강하면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의 '효사물거'(效死勿去)를 결심했다.
홍 교수는 "영조의 태도는 왕이 중심이 돼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준다"며 "이 같은 마음이 탕평정치와 왕권 강화의 기반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정조는 수원 화성에 신경을 써서 한양도성은 현상 유지하는 수준에 그쳤다"면서도 "도성의 수비, 관리, 출입 관련 규정을 법제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한양도성은 620년간 서울의 역사를 지켜본 건축물이자 관광 명소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도성을 도는 순성(巡城)을 즐겼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도성을 운동 삼아 걷는다.
"조금 여유 있게 도성을 돌면 좋겠습니다. 다들 가는 데 바쁜 것 같아요. 그러면 도성에 숨겨진 작은 묘미들을 지나칠 수밖에 없잖아요. 서울 전망도 감상하고, 도성에 있는 문이나 글씨도 살펴봐야죠."
홍 교수는 한양도성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지점으로 낙산 장수마을과 인왕산 단군성전 인근을 꼽았다. 그는 "두 장소에 자그마한 정자를 세우면 산을 따라 펼쳐진 도성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양도성은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올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사전심사에서 '등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한국 고유의 사상인 성리학과 풍수를 근간으로 축성됐다는 점에서 등재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던 터라 충격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해 홍 교수는 "임금이 피란 시에 사용하려고 조성한 남한산성이 이미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점에서 보면 역사적 가치가 더 큰 한양도성이 등재에 실패한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며 "등재 과정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면 등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한양도성에 이어 궁궐과 종묘에 대한 책도 준비하고 있다. 궁궐은 이미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놓은 상태다. 그러나 그는 생활사적 측면에서 보면 궁궐보다 도성의 중요성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에 한양도성만큼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하게 개입한 시설물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성문을 통과해야 '아, 이제 한양에 당도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특히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한양도성 숭례문을 보고 엄청나게 감동하지 않았을까요."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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