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 명예교수가 미국에서 내놓은 새 '북핵 구상'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핵심은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미 연합 군사훈련과 미군의 한반도 배치 전략자산을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북한의 비핵화를 한반도 평화체계 구축과 연계할 가능성도 시사했다. 한국의 동아시아재단과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공동 주최한 세미나의 기조연설과 문답에서 나온 말이다. 문 특보는 '학자로서 개인 자격'의 발언이고, 미국 정부와 논의도 거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군데군데 "문 대통령이 제안했다" "문 대통령이 염두에 두는 것은" 같은 표현을 썼다.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구상임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앞서 6.15선언 17주년 기념사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추가 도발을 중단하면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 천명했다. 문 특보가 말한 '핵·미사일 활동 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뉘앙스로는 문 대통령이 언급한 '추가 도발 중단'보다 엄격한 단계인 '핵·미사일 동결'로도 들린다. 하지만 문 특보 발언이 문 대통령 제안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우리 측 제안을 받아들이면 북한에 제공할 것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런 북한이 솔깃해할 만한 메시지를 던진 것 같다. 장기간 굳어진 남북 대치 국면을 어떻게든 풀어 대화의 물꼬를 열겠다는 절박함도 느껴진다. 그런 관점에서 문 특보의 제안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당장에는 우려와 비판의 시각이 더 많은 듯하다.
일단 미국의 반응이 뜨악하다. 앨리시아 에드워즈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대변인은 VOA(미국의 소리)에 "문 특보의 개인적 견해로, 한국 정부의 공식적 정책을 반영한 게 아닐 수 있다고 이해한다"고 밝혔다. 원론적 입장 표명 같지만 절제가 많은 외교적 표현의 특성상 우회적인 불쾌감의 표시로 볼 수도 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김명연 수석대변인은 "자칫 북핵 위협 앞에 대한민국을 무장해제 하는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한미 정상회담을 10여 일 앞두고 한미동맹 약화를 부추기는 발언을 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박원동 한동대 교수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활동과 한미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하는 '쌍중단(雙中斷)'이 원래 중국의 입장"이라면서 "협상 카드로는 가능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현저히 낮아진 상황에서 나올 법한 얘기"라고 말했다. 한반도 전략자산 전개와 연합훈련 축소를 북한의 핵 동결 보상으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나중에 핵 폐기를 끌어낼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뜻이다. 군 쪽에선 한미 연합훈련에 미국 전략무기를 전개하는 것이 한반도 지형 숙지와 유사시 증원전력 전개 시간 단축 등에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문 특보의 이번 발언은 현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본인은 부인했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 의제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고립 국면에 갇혀 있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면 기존 정책의 변화가 어느 정도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지금 그렇게 민감한 문제를 불쑥 꺼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학생 웜비어 석방 이후 미국 내 반북 기류 확산 등을 생각하면 사드 배치 문제만 해도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훨씬 더 예민하고, 미국 측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사안을 건드려 회담 의제에 혼란을 주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북한 문제는 한 번에 너무 빨리, 너무 멀리 가려 하면 역효과가 나기 쉽다.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