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의 한 수 통했다" 평가…낸드 기술력 확보에는 물음표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 반도체 업계의 뜨거운 관심사였던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 매각에서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이 결국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당초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인수'가 될 것으로 관측됐던 딜은 사실상 '지분 투자'의 모습으로 축소됐다.
도시바 반도체 지분의 51% 안팎만 인수하는 데다 SK하이닉스의 참여는 이 51% 중에서도 일부이기 때문이다.
특히 SK하이닉스는 3천억엔(약 3조700억원)가량을 출자가 아닌 융자(대출) 형태로 제공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최태원의 '한 수' 통했다…유력후보제치고 우선대상자 획득
결과적으로 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한 수가 통했다.
인수전 과정을 더듬어보면 SK하이닉스가 속한 미국 사모펀드(PEF)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은 당초 유력후보에 끼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확보하며 반전에 성공했다.
당초 시장의 관측은 가장 많은 인수가액(3조엔)을 제시한 대만 홍하이그룹 또는 미국 반도체 업체가 주도하면서 역시 높은 인수가(2조2천억엔)를 써낸 브로드컴 컨소시엄이 유력하다는 것이었다.
베인캐피털 측은 당초 인수가로 1조엔(10조1천억원)이 조금 넘는 액수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후순위로 밀리는 모양새였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베인캐피탈 측에 일본 경제산업성이 인수가액을 2조엔(20조5천억원)으로 늘리도록 요구했지만 초반의 열세를 딛고 반전을 일궜다.
최태원 회장의 승부수는 도시바와 인수자 간의 '윈윈' 전략이었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통째로 삼키는 전형적인 기업 인수의 그림이 아니라 인수 기업과 피인수 기업 모두에게 득이 되는 조금 색다른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것이었다.
최 회장은 4월 "도시바와 협업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단순히 기업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을 넘어 조금 더 나은 개념에서 워치(예의주시)해보겠다"고 말했다.
베인캐피털이 내놓은 방안은 SPC(특수목적회사)를 설립해 도시바 반도체의 지분 51%를 취득하고 나머지 49%는 도시바나 도시바 경영진이 보유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경영권을 확보하되 도시바 지분도 남겨둬 도시바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 떼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이다.
SPC의 구성도 베인캐피털 외에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와 국책은행인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으로 채워졌다. 일본 정부가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다만 일본 측 펀드와 은행 등이 참여하면서 지분 구성은 당초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 언론에서는 산업혁신기구, 일본정책투자은행, 베인캐피털, SK하이닉스, 도시바를 포함한 4∼5개의 일본 기업이 2천억∼4천억엔을 댈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면서도 중국계 기업이나 자본은 배제해 중국 기업으로의 반도체 기술 유출 등 산업보안에 대한 일본 관·재계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도시바나 일본 정부 모두가 일정 부분 만족할 수 있는 카드를 제시하면서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따낸 셈이다.
도시바는 실제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이 가치 측면에서나 임직원 고용 승계, 민감한 기술 일본 유지 면에서 가장 좋은 제안을 내놨다"고 밝혔다.
◇ 도시바와의 시너지 효과에는 물음표
하지만 이로 인해 당초 도시바 인수의 효과로 거론됐던 첨단 메모리 반도체 기술의 확보에는 물음표가 붙게 됐다.
성장성이 크다고 평가되는 낸드플래시 기술의 원조 기업인 도시바를 SK하이닉스가 품에 안으면 상대적으로 약한 첨단 낸드 기술을 확보해 단숨에 낸드 시장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다는 점이 반도체 업계가 바라보는 도시바 인수의 시너지 효과였다.
그러나 SK하이닉스가 독점적으로 또는 주도적으로 도시바를 인수하는 형식이 아니다 보니 그만큼 경영 참여나 기술 확보에는 제약이 따르지 않겠느냐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SK하이닉스의 자본 기여도가 3천억엔 규모라면 이는 총 2조엔 안팎으로 추정되는 인수 대금 가운데 15%의 비중에 그친다.
물론 그럼에도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이 설립할 SPC가 지분 51%를 쥐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만큼 도시바와 SK하이닉스 간 상당 부분의 협력이나 교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낸드플래시의 기술 표준이 2D(2차원)에서 3D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도시바의 3D 기술력이 SK하이닉스로 일정 부분 흘러들어오면 SK로선 경쟁력 강화의 기회가 된다.
무엇보다 반도체 업계 입장에서는 도시바가 중국 업체에 인수되지 않음으로써 과도한 설비투자 경쟁과 그로 인한 낸드플래시 가격의 하락 리스크를 피하게 됐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 선언 이후 메모리 반도체 기반 육성에 총력전을 벌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세계 반도체 업계는 이런 우려를 해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자금 마련을 위해 불가피하게 반도체 사업을 매각해야 하지만 알짜 사업의 해외 매각, 핵심기술의 외국 유출을 피하고 싶은 도시바와 일본 정부의 고민을 여러모로 살핀 SK하이닉스의 제안이 결국 채택된 셈"이라고 말했다.
◇ 향후 절차는…웨스턴 디지털 제소가 변수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은 앞으로 정밀실사를 거쳐 SPA(주식 매매계약)를 체결하게 된다. 일본 언론에서는 도시바의 주주총회가 열리는 28일 이전에 매각 협상 최종합의가 나올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그다음에는 전 세계 주요 국가의 독점규제 당국으로부터 기업결합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번 인수로 반도체 부문에서 독점적 지위의 기업이 새로 탄생하느냐가 관건이 될 텐데, SK하이닉스가 주주가 아닌 대출자의 형태로 참여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반도체 업계는 관측한다.
SK하이닉스가 출자가 아닌 융자를 해주는 형태로 SPC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점유율은 세계 5위인데, 1위가 삼성전자여서 소액 출자를 해도 한국에 반도체 집중을 꺼리는 미국과 중국의 독점금지법 심사가 엄해진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일본 언론들은 내년 3월 말까지 도시바 인수의 최종 마무리, 즉 주금 납입 절차가 매듭지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도시바로선 이번 매각에서 확보한 현금으로 원자력발전 사업 부문에서 생긴 막대한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이 시한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웨스턴 디지털(WD)과 도시바 간 분쟁은 주요 변수다. WD는 도시바의 오랜 협력 파트너였지만 이번 인수전에서 독점협상권을 요구하다 사이가 틀어졌다.
WD는 매각 절차 중단을 국제중재재판소(ICA)에 요청했는데 그 결과에 따라 이번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원천무효화될 수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로서는 당장 가시적인 성과보다도 반도체 산업의 큰 격변기에 흐름을 올라타고 다양한 사업 기회를 모색할 수 있는 중장기적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sisyph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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