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원 전북대 교수, 동북아재단 학술회의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숙종 38년(1712) 백두산 천지에서 동남쪽으로 4㎞ 떨어진 해발 2천200m 지점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비석이다.
청나라의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은 조선의 접반사(接伴使·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아치) 대신 그보다 직급이 낮은 군관을 만나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土門)을 분수령으로 삼는다'는 글을 새긴 비석을 건립했다.
하지만 백두산정계비는 19세기 후반 이후 한중 학자들 사이에 논쟁거리로 부상했다. 조선 학자들은 비석에 있는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松花)강이라고 봤으나, 청나라 쪽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다 1909년 일제가 청나라 해석을 받아들인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두만강이 한국과 중국의 경계로 확정됐다.
이강원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23일 동북아역사재단이 개최한 '만주 역사지리 연구와 백두산' 국제학술회의에서 백두산정계비는 지리적 오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고 지적하고, 이에 따라 양국의 국경을 논의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연구를 위해 지형도와 사료를 검토하고 백두산 일대를 세 차례 답사했다고 밝힌 이 교수는 목극등이 생각한 토문은 두만강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목극등이 인식한 것과 같은 하천은 두만강 상류에 없었고, 따라서 그가 요구한 경계표지물의 경로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1712∼1713년 조선이 설치한 경계표지물은 목극등의 요청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목극등의 수계인식 오류에 또 다른 오류를 덧칠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즉 목극등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갈라지는 지점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의 경계를 나누고자 했으나, 지리적으로는 그 지점이 맞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의 인식도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경계표지물 설치 결과를 놓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의사소통이나 상호 검증이 없었다"면서 "백두산정계비를 근거로 양국의 국경을 논의하는 것은 합리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는 훗날 중국과 국경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면 백두산 지역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계는 쑹화강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점, 압록강과 두만강이 모두 천지와 지질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 양국 모두 천지에 대해 신성성과 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