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 오지 60㎞ '구비구비'…폭염엔 비지땀, 비 오면 진흙탕 고투
어르신과 말벗하고 약 심부름하며 주민 안부도 확인…"집배원 아닌 가족"
(춘천=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찜통더위에 그늘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지만, 저를 기다리는 고객이 있으니 쉴 수 없지요."
강원도 춘천의 29년 차 베테랑 집배원 최제흥(56) 씨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는 보람에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에도 힘든 내색이 없다.
최씨가 맡은 배달 구역은 시 외곽 사북면 가일리, 고탄리, 고성리, 송암리, 인람리 마을이다. 이들 마을의 면적을 합치면 58.4㎢로, 서울 여의도(2.9㎢)의 20배가 넘는다.
집배원 1명이 담당하지만, 병가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는 옆 동료가 구역을 나눠 배달을 돕는다. 품앗이 배달을 일컫는 '겸배'는 집배원들만의 직장 문화다.
스마트폰과 이메일 등 IT 기술의 발달로 우편물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농어촌 읍·면 지역 집배원들은 아직도 하루 평균 300여 통 정도를 꾸준하게 배달한다.
편지나 엽서 등 고전적인 우편물보다는 홍보물, 고지서, 신문 등이 많아졌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소식이나 정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치 소홀함도 없다.
하루 평균 대략 500여 통을 배달하는 춘천 도심 집배원보다 배달 양은 적어도 듬성듬성 자리 잡은 시골 마을의 이동 거리를 생각하면 업무 강도가 절대 약하지 않다.
최 씨의 경우도 오토바이로 온종일 달리는 거리는 60㎞가 훌쩍 넘는다.
이달 26일 춘천우체국에서 손 빠르게 우편물 분류작업을 마친 최씨는 오전 9시30분 우체국을 출발, 여느 때처럼 고개를 몇 구비 돌고 돌아야 하는 산골 마을로 향했다.
외지고 비좁기까지 한 고개는 자동차도 '헉헉' 댈 정도니 오토바이는 안간힘을 쓰며 넘어야 한다.
출발할 때 기름을 넣고 타이어 공기압과 체인 점검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섰지만,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슬쩍 귀띔한다.
그는 "산골만 오가니까 오토바이 오일도 2주일에 한 번꼴로 넣는다"며 "여름철이야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겨울철 폭설에는 아예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고갯길을 넘으니 내려가는 길이 더 가파르다. 앞으로도 산, 뒤로도 산이다.
척박한 땅을 일구는 이 동네 사람들은 생각하면 집배원의 고단함을 탓하기가 미안하다.
오늘 첫 배달지는 지난 1965년 춘천댐 건설로 '육지 속 섬마을'이 된 가일리다.
최씨는 "2010년 정도만 해도 건너편 마을에서 배를 타고 배달왔지만, 이제는 뱃길이 끊겨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춘천우체국에서 출발한 지 30여분이 지났을까, 약 16km를 달려 처음 도착한 곳은 감자밭을 일구고 사는 정황모(87) 할아버지 집이다.
고지서와 신문을 건넨 뒤 어르신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말동무가 돼준다. 이 집만 오면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정 할아버지가 갓 캐낸 감자는 가뭄에 크지를 못해 조막손만 하다.
그래도 "이게 농사"라며 자연의 성과에 감사하는 어르신의 넉넉한 마음에서 최씨는 삶의 지혜도 새삼 배운다고 말했다.
정 할아버지는 "최씨는 매일 이 시간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라며 "어떤 소식을 가져왔을까 항상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오전에만 가일리와 인람리에 배달해야 할 우편물은 약 80여 통. 마음이 바쁜 탓에 서둘러 찾아간 두 번째 집은 비어있다. 주인은 없지만, 마당을 지키는 강아지는 최씨가 익숙한 듯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그다음 찾아 나선 길은 풀이 무릎 위까지 자란 비포장이다. 비만 내리면 진흙탕이어서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고 마른 날이면 먼지를 뒤집어쓰는 길이다.
웬만한 성인 주먹 크기의 돌멩이가 곳곳에 박힌 산길인 탓에 1km가량 덜컹거리며 오토바이를 타다 보면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하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연신 물을 마셔도 갈증은 또 금세 찾아온다.
비포장도로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운전한 탓인지, 힘껏 힘을 주었던 다리와 팔이 얼얼하다. 힘들게 찾아온 마을이지만 분위기는 한산함을 넘어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처마를 맞대고 다섯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 타지에서 온 집 한 채밖에 없다"고 말했다.
2분 정도 쉬었을까, 좁다란 임도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10km 가량을 더 달려 이웃 인람리도 향했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마치 화생방훈련을 받는 듯하다. 여간 더운 게 아니지만, 안전수칙상 벗을 수도 없다.
1시간 30분 가량 20여 개 가옥을 돌아다니며 배달한 우편물은 50여 통. 우편물은 어느새 절반으로 줄었다.
춘천호를 끼고 이어진 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좁긴 마찬가지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후진하거나 비켜서는 일이 많은데, 오늘은 다행히 차가 없으니 배달이 제법 빠른 편이다.
최씨는 "귀농, 귀촌 영향으로 새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다 보니 일일이 찾아다녀야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오전 일과를 마친 최 씨는 돌아오는 길에 농사를 짓는 홍경표(64) 씨 집에 들렀다. 몸이 불편한 홍씨 어머니의 건강에 별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우편물 배달과 함께 약 심부름도 한다는 최씨의 말에서 오랫동안 해온 일처럼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홍 씨는 "거의 매일 오가면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가족과 다름없다"며 "20년 가까이 농사일도 도와주고 명절에는 홀몸노인도 돕는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최씨를 추켜세웠다.
나머지 우편물 배달을 마치고 우체국으로 돌아오니 오후 6시. 1시간가량 내일 업무를 정리한 뒤에야 퇴근길에 나섰다.
매일 한 시간씩 일주일에 7∼8시간 초과근무는 일상이다.
최씨는 "최근 집배원들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같은 동료로서 너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기다리는 산골 마을 어르신들과 농부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라며 총총걸음으로 퇴근길을 재촉했다.
수천 세대로 가는 각종 고지서와 택배 물량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도시 집배원들에 비해 최씨와 같은 농어촌 담당 집배원들에게는 느림 속에서 정(情)을 배달한다는 말이 아직은 어울린다.
강원지역의 경우 750여 명 집배원 가운데 절반이 넘는 420여 명이 읍·면 지역을 일터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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