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콘서트홀 기획공연 '우리시대 작곡가 진은숙' 리뷰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클래식 음악 팬들이 오래 기다려온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드디어 영상물이 아닌 실연으로 만날 수 있었다. 2007년 6월 30일 바이에른 뮌헨 국립오페라 초연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7월 1일 롯데콘서트홀 무대에서였다. 한국 초연일 뿐 아니라 아시아 초연으로 롯데콘서트홀이 기획한 이 공연은 이날 2부에서 약 50분 분량의 발췌본으로 이루어진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었다.
루이스 캐롤의 원작을 토대로 데이비드 헨리 황이 대본을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번 발췌본 공연에는 미국, 독일, 영국 등지에서 이미 이 작품의 콘서트 오페라 버전 공연에 참여해 두드러진 호평을 받았던 소프라노 레이첼 길모어(앨리스), 메조소프라노 제니 뱅크(공작부인), 바리톤 디트리히 헨셸(미친 모자장수)이 함께 했다.
10곡으로 구성된 2부 '앨리스' 공연은 소프라노의 청아한 음색으로 문을 열었다. 작가 루이스 캐롤이 배를 저어가며 앨리스와 다른 두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을 노래하는 '앨리스-아크로스틱'이다. "언제나 너무 늦고, 언제나 너무 일러", "나는 대체 누구일까" 등의 철학적 진리와 질문으로 가득한 앨리스의 노래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색에 잠겼지만, 이상한 나라에서 급격하게 몸이 커진 앨리스가 "안녕, 내 발들아! 이젠 너희끼리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 너희까지 생각해주기엔 난 이제 너무 멀리 있으니까"라고 얘기할 때는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청량한 고음과 생기 넘치는 표현력을 지닌 레이첼 길모어는 앨리스의 현신처럼 보였다.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한 첫 곡 '쥐꼬리 이야기'는 중국 전통 음악극 형식인 곤곡(崑曲)의 창법을 원용한 듯한 희극적 방식으로 작곡됐다. '공작부인과 앨리스의 대화'에서 히스테릭하고 그로테스크한 음악을 탁월하게 표현한 제니 뱅크는 수없이 반복되는 '와우 와우 와우'에서 오케스트라 총주의 음량을 뚫고 나오긴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목소리도 오케스트라 악기의 하나로 기능하는 현대오페라의 특성을 감안하면 별문제는 아니었다. 바리톤 디트리히 헨셸은 '미치광이 다과회'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가창력과 존재감을 보여줬다. 캐롤의 원작과 달라진 진은숙의 '앨리스' 피날레 장면에서 관객은 수없이 많은 꽃과 엄청난 빛의 홍수를 음악으로 체험하며, 어린 시절의 악몽을 벗어나 비로소 성장해갈 희망을 보게 된다.
이에 앞선 1부에서는 진은숙의 '피아노 에튀드(연습곡)' 1, 2, 5번과 '피아노협주곡'을 감상할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연주한 에튀드는 인도네시아 가믈란 음악의 리듬 모델과 음향이 반영된 1번, 뛰어난 연주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2번,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5번 ‘토카타’였다. 이날 연주를 들은 피아니스트들과 음악학자들은 대체로 '테크닉은 탁월했지만 악상과 음향이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감상평을 내놓았다. 연주자의 해석 문제인지 공연장의 음향 문제인지에 대한 의견 교환도 조심스럽게 오갔다.
스트라빈스키, 브리튼을 비롯해 현대음악에 출중한 해석력을 보여온 이스라엘 지휘자 일란 볼코프는 서울시향을 이끌어 김선욱과 함께 진은숙의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했다. BBC의 의뢰로 작곡해 1997년에 초연한 이 작품에는 30대 중반 젊은 진은숙의 놀라운 활력과 실험 정신이 가득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주고받으며 대결하는 고전적인 피아노협주곡의 방식을 과감하게 벗어났으며, 특히 현악 및 관악 편성에 덧붙여진 24개의 타악기가 만들어내는 참신한 음향은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혼돈 속의 독특한 질서를 보여준 1악장, 만돌린과 하프의 영롱한 음색 그리고 피아노의 극단적 음폭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2악장, 음악의 다양한 조각들이 패치워크처럼 짜인 3악장, 피아노의 자유롭고 유희적인 성격을 극대화한 피날레 악장. 23분의 연주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모든 감각을 초집중하게 하는 악곡이며 연주였다. 김선욱은 빛의 속도로 건반을 누비며 폭발하는 에너지 속의 정제된 비르투오소를 보여주었고, 서울시향도 밀도와 집중력이 돋보이는 연주를 선사했다.
콘서트가 끝난 후 로비에서 여러 관객과 인사를 나눈 작곡가 진은숙은 이날의 연주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현대음악은 자폐적이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청중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대로, 철학적 사색과 음악의 즐거움을 청중과 공유할 수 있었던 매혹적인 연주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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