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건보재정 다변화·진료비 지급제도 개선해야"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1977년 7월 500인 이상 사업장에 직장의료보험을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회보험제도로서의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12년만인 1989년에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로 자리 잡는 등 지난 40년간 국민 보건수준 향상에 기여한 게 사실이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헬스데이터 2015년 보고서에 따르면 대표적 건강지표들인 기대수명은 81.8세로 OECD 평균(80.5세)보다 많고, 영아사망률은 출생아 1천명당 3.0명으로 OECD 평균(4.1명)보다 낮다.
암과 심뇌혈관질환 사망률도 OECD 평균과 비슷하거나 낮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려운 한국 보건의료보장체계가 짧은 기간에 이룩한 성과다.
하지만. 앞날이 밝은 게 아니다. 벌써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와 뒤덮을 기세다.
◇ 건강보험 보장은 제자리걸음인데, 국민부담은 높아
지난 40년간 역대 정부는 건강보험의 혜택을 확대하려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수년째 건강보험의 보장수준은 60% 안팎에 머물러 있다. OECD 평균(73.1%)보다 훨씬 낮다.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항목이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 국민이 가입한 사회보장장치인 건강보험제도가 있음에도 충분한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면서 국민은 민간의료보험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2015년 조사결과를 보면, 민간의료보험 가입비율은 88.1%에 달했고, 월평균 민간의료보험료는 가구당 31만원에 이르렀다.
이런 이중의 의료비로 가계의 진료비 부담은 높은 편이다.
2010∼2016년간의 연간 진료비 증가율은 평균 7.4%에 달했지만, 최근 4년간(2012∼2015년) 실질임금 상승률은 평균 2.37%에 불과했다. 소득 대비 진료비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가계직접 부담 의료비 비중은 36.8%로 OECD 국가 중에서 두 번째로 높다. OECD 평균은 19.6%이다.
이렇다 보니 의료비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위기에 처하는 재난적 의료비 발생가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가구의 연소득에서 의료비 지출이 10% 이상을 차지하는 가구는 2013년 19.3%로 5가구 중 1가구꼴이었다.
◇ 건강보험재정에 벌써 적신호
현재 건강보험은 21조원이 넘는 누적적립금을 기록하며 비교적 곳간이 넉넉한 편이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재정기반이 갈수록 취약해지는 데다 만성 퇴행성 질환 중심으로 질병 패턴이 변하고 재활치료 수요가 급증하면서 노인 의료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발표한 2016∼2025년 8대 사회보험 중기 재정 추계를 보면, 건강보험은 2018년 적자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됐다.
건강보험 수지는 2011년 6천8억원 흑자로 전환한 뒤 2014년까지 흑자 규모가 커졌지만 4대 중증질환에 대한 보장성이 확대되면서 보험 지출이 급증하는 추세다.
정부는 지난해 52조6천억원이었던 건강보험 총지출은 연평균 8.7%씩 늘어 2024년 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건강보험 재정악화의 주된 원인은 매년 30만명씩 늘고 있는 노인 인구다. 2020년부터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65세로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는 해마다 40만명씩, 2015년부터는 매년 50만명씩 증가할 전망이다.
고령화 영향으로 총 건강보험 진료비 중 65세 이상 인구의 진료비 비중은 지난해 38.6%에서 2025년 49.3%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됐다.
◇ '1977년 건강보험 체제' 한계 봉착…건강보험제도 개혁 절실
'1977년 건강보험 체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저성장과 고용 없는 성장 기조 아래서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보기 힘든 저출산 고령화 속도는 건강보험체제의 지속가능성을 급격하게 훼손할 것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돈 낼 사람은 급격히 줄고, 건강보험 보장혜택을 받을 사람은 크게 늘기에 보험재정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기존 의료제공시스템의 낭비적 요소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급증하는 의료비를 국가와 의료공급자가 책임지고 효율적 진료비 절감 구조로 건강보험제도의 개혁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 인구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속에서 근로소득 등 특정 재원에만 편중된 현재의 건강보험 재원을 다변화해 재정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교수는 "'사회적 대합의 기구'에 준하는 조직을 만들어 현행 민간공급중심의 의료제도를 지속 가능한 공적 의료보장체제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건강보험제도의 진료비 지급구조는 이른바 '행위별 수가제'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의료공급자가 의료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그렇다 보니, 의료공급자는 보험재정 증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를 줄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더 늘리려고 한다. 이 진료비는 고스란히 국민이 짊어진다.
신 교수는 또 의료공급자에게 주는 건강보험급여의 총액을 미리 정하는 '총액예산제'로 진료비 지급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해진 한도에서 보험재정을 쓰도록 함으로써 정부와 국회, 의료공급자가 어떻게든 스스로 알아서 진료비 부담을 줄이려고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1, 2, 3차 의료기관간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영리추구의 무한경쟁을 벌이는 현행 민간중심의 의료공급시스템 아래서는 불필요한 의료서비스와 진료비 증가만 낳을 뿐이라며 주치의 제도를 하루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문옥륜 전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이 20%를 밑도는 상황에서 근로소득에만 과도하게 건강보험료를 매기는 불공정한 부과체계에 대해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며 "재정안정을 도모하려면 담배부담금뿐 아니라 주류세 등에서도 추가적인 재원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sh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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