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구월이라/ 휘영청 푸른 하늘 아래/ 황금 국화 피였네/ 황금 국화에 솟아난/ 나의 고향/ 우리 연변!// 꽃송이에 때오르는/ 자색 노을은/ 지난 시절의 핏빛인가?// 꽃머리에 또오르는/ 꽃구름은/ 밝은 나날의 행운인가?// 고향 사람들/ 삼림으로 묶어져/ 당의 은덕 노래하거니// 황금 국화에 훤히 열린/ 연변의 하늘에/ 번영은 별무리처럼 빛나고// 황금 국화에 당실히 솟은/ 연변의 땅에/ 행복은 꽃떨기처럼 피여났네."
조선족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리욱이 1984년 2월 사망하기 직전에 쓴 '고향'의 전문이다.
오는 15일 탄생 110주년을 맞는 리욱은 조선족 시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시인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간도 문학을 대표했으며 해방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의 토대를 일구었다. 암담했던 시절, 인간과 자연, 생명을 노래했으며, 새로운 이상과 민족의 앞날을 제시했다.
그는 서정시와 서사시, 한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문학 이론,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했다.
리욱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장원. 해방 전까지는 학성, 월촌, 단림, 산금, 월파 등의 필명을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리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10년 지린 성 옌볜 허룽현으로 이주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만주 일대에서 저명한 한문학자인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중국과 조선의 고전을 배우며 자라 어린 나이에 한문에 능통하고 한시를 잘 썼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에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24년 17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간도 지역의 진보적 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일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만두고 야학에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일보 간도특파원으로 일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부지런히 시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리욱은 시인 김조규와 함께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재만조선시인집'을 간행하여 조선족 문단의 결집을 도모했다.
해방 이후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옌지중소한문회협회 문학국장, 문예지 ‘불꽃’의 편집 등을 맡아 조선족 문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조선족 문학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 동북군정대학에 들어가 혁명이론을 학습하며 첫 시집 '북두성'을 출간했다. 졸업 후 잡지 '대중'의 주필 겸 옌볜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194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북륜의 서정'을 펴냈다.
그는 옌볜대학을 세우는 데 참여했고, 옌볜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51년 말부터 옌볜대학 조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소련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 혁명적 사실주의 창작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리욱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시기 새로운 국가체제 안에서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모색했다. 1956년 조선족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해 중국작가협회 옌볜분회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족 문학이 중국 문학의 일부로 인정받는 동시에 독자적인 문학을 구축할 수 있도록 중국 문학과의 교류에 힘썼다. 중국어로 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동 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교수자격은 취소됐으며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벽지 농촌으로 추방됐다.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지나고 복권된 리욱은 다시 시 창작에 힘을 쏟아 1980년 73세의 나이로 '리욱 시선집'을 내놓았다.
리욱은 시집으로 '북두성'(1947), '북륙의 정서'(1949), '고향사람들'(1957), '장백산하'(1959), '연변의 노래'(한문. 1959), '리욱시선집'(1980) 등을 남겼고, 이론서 '현대소설의 구성'을 출판했다. 1982년 항일투사들의 영웅적 투쟁을 담은 장편서사시 '풍운기' 제1부를 펴냈고 이어 제2부를 쓰다가 1984년 2월 6일 77세를 일기로 뇌일혈로 사망했다. '풍운기' 제2부는 유고로 발표됐다.
시집 '고향사람들'은 조선족의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소재로, 간도 개척 과정에서 발생했던 지주와의 투쟁, 만주사변 이후 장백산을 근거지로 벌였던 유격전, 항일 전쟁 이후 승리의 감격 등을 주 내용으로 하여 조선족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의 시 세계는 자연물에 대한 순수한 서정에서부터 간도 조선인들이 처한 삶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향한 열정, 역사적 항쟁과 혁명적 투지, 그리고 인생을 반추하는 명상적 내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그의 아들 리선호는 2015년 2월 9일 옌볜도서관에서 열린 '다시 읽는 우리 문학' 세미나에서 "아버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가 일자무식이였지만 항상 어머니를 존중해주셨다. 자식들이 책을 사고 싶어 할 때마다 기꺼이 사주셨다. 아버지와 함께 문학상을 받은 적 있다. 모두들 우리 집에 쌍봉황이 날아들어 온다고 기뻐해 주셨다. '너무 틀에만 얽매이지 말고 틀을 벗어나 사는 것도 좋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리욱의 생애는 일제 치하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수립, 문화대혁명 등 격변기에 시련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 당당한 소수민족으로 정착한 200만 조선족의 삶과 역사를 보여 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나 중국 땅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낸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이며 개척사이다.
일제의 억압을 피해 북으로 북으로 떠나던 시절, 조선인이 가는 곳에 조선의 문학이 있었다. 이들은 각박한 현실에서도 조선족 문학의 꽃을 피웠다. 만주의 조선인 문학인들은 1933년 11월 '북향회'를 설립하여 동인지 '북향'을 중심으로 문단을 형성했으며 1940년대 들어서는 현지의 한글신문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살벌한 검열과 용지난으로 책 한 권 발간이 어려웠던 본국과 달리 이들은 1940년 재만 작가집 '싹트는 대지,' 1942년 조선족 최초의 시선집 '만주시인집'과 '재만조선시인집' 등을 펴냈다. 1942년부터 해방까지 거의 유일하게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창작집인 안수길의 '북원'이 이곳에서 출간됐다. 조선족 문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면면히 성장했다. 조선족 문단이 만들어진 지 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문학, 북한의 문학과는 다른 조선족 문학이 형성됐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좌초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우리 민족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조선족 문학은 한민족 문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것이 간도의 조선족 문학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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