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상 새 소설집 '병산읍지 편찬약사'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소설가 조갑상(68)은 수십만 목숨을 앗아간 한국전쟁 전후사의 비극인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천착해왔다. 소설집 '테하차피의 달'(2009)과 장편 '밤의 눈'(2012)에서 이름 없는 죽음을 애도하고 남은 이의 슬픔을 위로했다.
작가는 만해문학상 수상작 '밤의 눈' 이후 5년 만에 낸 소설집 '병산읍지 편찬약사'(창비)에서도 보도연맹 사건을 가운데 놓고 개인과 사회, 이념과 역사의 뒤엉킴을 그린다. 수록된 단편 7편 중 앞쪽 3편에 보도연맹 사건이 등장한다.
표제작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역사 왜곡·편집이 세속적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규찬 교수는 고향인 병산읍이 펴내는 '병산의 어제와 오늘' 중 역사 부문을 집필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초고를 작성한다. 보도연맹원 모집이야 해방 이후 남한 곳곳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병산읍은 그와 관련한 남다른 '역사'가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농업창고에 구금된 연맹원 90여 명을 경찰서 지서장이 풀어준 덕택에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막았다.
이 교수는 과거사위원회 조사 때도 몇 줄 정도로 지나간 자랑스러운 역사를 읍지 초고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읍지 편찬위원회에 참여한 지역 유력인사들로부터 타박만 돌아온다. "애써서 예산 통과해드렸더니 좌빨 글 싣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 교수는 보도연맹 서술을 줄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예 집필에서 손을 뗀다. 필자가 바뀐 읍지는 몇 달 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발간되고 지역 국회의원이 참석한 출판기념회도 열린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는 책임지지 않는 이들의 삿된 이해관계 탓에 왜곡된 결과일 수도 있다고 작가는 경고한다.
소설 속 인물은 대개 역사 앞에서 한없이 작을 수밖에 없는, 제 의지와 무관하게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물구나무서는 아이'의 김영호가 그렇다. 한국전쟁 때 연맹원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학교에선 "뺄갱이 놈의 새끼"라는 모욕과 함께 반공교육을 사무치게 받았다.
"다른 일반 친구들보다 백배 천배 이승만 박사와 우리 대한민국에 충성해야 한다." 김영호는 평생 학교와 사회로부터 세뇌에 가깝게 반공사상을 주입받았다. 그런 그가 말년에 희망버스 반대집회에 다니게 된 건 오로지 그의 의지와 선택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설들은 과거를 직시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을 덜어주고 개인과 역사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지난한 노력으로 읽힌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6·25전쟁으로 이래저래 상처받은 인물들은 그들대로, 또 다른 갈등과 고민 속에 사는 인물들은 또 그들대로 우리의 현대사를 통과하고 있다. 분단은 너무나 엄연해서 오히려 잊고 있거나, 왜곡과 억압을 마냥 허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고 말했다. 220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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