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글로벌 리더' 이위종

입력 2017-07-11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글로벌 리더' 이위종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올해는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특사단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최후의 노력을 펼친 지 110주년이다.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 겸 대변인 이위종으로 이뤄진 특사단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헤이그에 1907년 6월 25일 도착했다. 44개국 대표단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일제 침략의 야욕을 폭로하려 했으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회의장에도 입장하지 못한 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순국하고 만다.



이준(1859∼1907)은 이국땅 네덜란드에 외롭게 묻혔다가 1963년 10월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헤이그에서 특사 일행이 묵었던 호텔은 1995년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이상설(1870∼1917년)은 헤이그에 파견된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1917년 3월 병사했다. 우수리스크에는 그의 유허비가 세워졌으며 올해 서거 100주년을 맞아 학술대회와 전시회 개최, 기념관 건립 등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이위종(1887∼?)은 앞의 두 인물에 비해 존재감이 희미해 보인다. 헤이그 사건 이후 활동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망 연도조차 불확실하다.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나 비석도 없다. 올해 탄생 130주년을 맞았지만 서울시뮤지컬단이 그의 일대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밀사-숨겨진 뜻'을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린 것을 빼고는 이렇다 할 기념행사도 치러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그가 러시아혁명 후 적군(赤軍·혁명군)에 몸담았기 때문에 이념 대결의 역사 속에서 빠르게 잊혔을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위종은 주미 특명전권공사,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3국 특명전권공사, 주러시아 공사를 지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외국어와 서양식 매너를 익혔다. 영어·불어·러시아 등 7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며 1905년 러시아 귀족의 딸 엘리자베타 놀켄과 결혼했다. 당대 최고의 청년 국제 엘리트이자 차세대 글로벌 리더로 손색이 없었다.




러시아공사관 참사관으로 있다가 특사단에 합류한 이위종은 가장 나이가 어리고 직급도 낮았으나 만국평화회의 참석자들과 기자들은 그를 주목했다. 고종 황제와 같은 전주 이씨라는 점을 들어 '프린스'(Prince)라고 보도한 언론도 많았다. 이위종은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후손이자 흥선대원군 시절 형조판서와 어영대장 등을 지낸 이경하의 손자다.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각국 대표들과의 면담도 무산되자 그의 실력이 빛을 발했다. 현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설명한 데 이어 7월 8일 국제기자클럽에 초청돼 각국 기자들 앞에서 불어로 연설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놀랍고도 원통하게도 모든 나라에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을사조약은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중략)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하지 않았으나 무자비한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항거한다는 마음으로 하나가 돼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을 모두 죽여 없애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자들은 1시간이 넘는 이위종의 연설에 감복해 즉석에서 한국 지지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본 기자로 유일하게 대회를 취재한 다카이시 신고로 특파원은 이튿날 오사카마이니치신문 1면에 '대한(對韓) 조치 단행할 시기-헤이그 한인의 괴운동'이란 제목으로 일본 정부에 강력 대응을 촉구하면서도 "그들 3명은 진실로 애국의 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 임무를 떠안은 것 같았다"고 보도했다. 이위종의 활약에도 열강은 조선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일본은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병탄의 수순을 밟아나갔다.




이위종은 1908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해 4월 숙부인 이범윤과 최재형 등과 함께 의병단체 동의회를 발족시켜 한반도와 만주 접경 지역에서 항일전쟁을 벌였다. 7월 두만강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이범윤과 최재형 세력이 대립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1911년 1월 26일 부친이 자결한 뒤 철도 세관원으로 생활하며 아내와 세 딸을 데리고 어렵게 생계를 꾸렸으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가 러시아혁명 때 적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웠다는 소문도 있고,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국 해방 지지 결의대회에서 연설했다는 주장도 있다. 1920년 4월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과의 전투 중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뒤로도 활동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때 숨졌을 것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위종의 외손녀 류드밀라 예피모바와 외증손녀 율리야 피스쿨로바는 2015년 한국 국적을 얻었다. 에피모바 씨도 외할아버지의 사망 경위를 알지 못하며 외할머니는 1943년 독소전쟁 때 볼고그라드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 110주년과 이위종 탄생 130주년을 맞아 냉전의 그늘에 가려진 이위종의 발자취를 발굴해 기리는 움직임이 각계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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