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가 이현애 '독일 미술가와 걷다' 펴내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인사들의 명단을 관리했다는 의혹인 '블랙리스트' 사태가 작년 말 수면 위로 부상하자, 사회 곳곳에서는 "나치 시대도 아니고…"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문화예술인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모두 유대인이었을까. 어떠한 이유로 이들은 제거돼야 했을까.
미술사가 이현애의 '독일 미술가와 걷다'(마로니에북스 펴냄)는 나치로부터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혔던 독일 미술가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은 시류에 맞춰 급조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수년에 걸쳐 정리하다 보니 대다수가 나치 시대 독일 문화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 예술가로 지목된 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치 블랙리스트 정책보다는 각양각색의 예술을 남긴 작가들의 소개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책은 독일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시간 흐름에 따라 작가들을 소개했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는 요절한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1876~1907)다. 그는 서양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여성 화가의 누드 자화상을 남겼다. 그 자화상에는 예술 세계에서나 일상에서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고전적인 형상이 아니라 길고 가는 형태의 조각상을 남긴 빌헬름 렘부르크, 전쟁을 겪으면서 강렬한 도시풍경화와 자화상을 남긴 에른스트 키르히너, '전쟁'을 비롯해 현실을 냉정하게 관찰했던 오토 딕스 등의 이야기가 차례로 이어진다.
나치는 표현주의 미술가들을 특히나 적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들이 자기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표현할 줄 아는 개인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책은 나치의 실체를 일찍이 간파해 이를 작품으로 표현했던 딕스의 경우처럼 '퇴폐미술가'가 반드시 유대인이었던 것도 아니다는 점도 알려준다.
나치의 광기 속에서 독일 미술계에 암운이 드리운 시기, 반대로 독일 미술의 열매는 미국에 쌓이기 시작했다. 문화사가 피터 왓슨이 지적한 대로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창시자는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예술가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를 뒤흔든 '블랙리스트'를 다시 곱씹게 된다. 저자는 "나치는 길들여지지 않는 눈을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을 다스리고자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면서 "부당한 살생부는 언젠가 삶의 이야기로 다시 쓰이고, 이 책이 그 증거"라고 밝혔다.
320쪽. 1만6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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