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② '죽음의 유배길' 6,500㎞

입력 2017-07-20 09:00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② '죽음의 유배길' 6,500㎞

이유·행선지 모른채 화물칸서 짐짝처럼…17만∼20만명 이동, 1만명 사망

이주명령 의도 '미스터리'…노동력 활용, 안보 우려, 조직화 방지 등 추정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922년을 기점으로 독립의 꿈은 멀어지는 듯하고 모국과의 관계도 단절돼 한민족 정체성이 엷어지기는 했으나 연해주 고려인사회는 안정과 성장을 이뤄나갔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어렵게 자리 잡은 터전을 버리고, 세간살이는 물론 수확을 앞둔 농작물까지 남겨준 채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야 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과 인민위원장 몰로토프는 1937년 8월 21일 '극동 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해'란 극비명령서에 서명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 강제이주 앞두고 지도자급 2천500여 명 처형

강제이주에 앞서 소련 정부는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2천500여 명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공포심을 불어넣어 저항 의지를 꺾고 조직적인 반발을 막으려는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강제이주는 9월부터 12월까지 급박하게 진행됐다. 불과 며칠 만에 통보를 받고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등 집결지에 모여 왜 끌려가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시베리아횡단열차의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옮겨졌다.

아무런 위생시설도 없고 방한 장치도 갖춰지지 않은 열차에서 한 달간 6천500㎞를 달리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희생자가 속출했다. 가족들은 기차가 정차할 때 시체를 담요에 둘둘 말아 철로변에 파묻고 길을 떠나야 했다. 11월 초에는 하바롭스크 인근 베리노역을 통과하던 열차가 전복돼 21명이 죽고 50여 명이 다치는 사고도 일어났다.

1938년의 한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고려인 1천 명당 42명이 사망했고 어린이는 5명에 1명꼴로 숨졌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1만1천여 명, 혹은 1만6천여 명이 이동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질병 기아 등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까지 포함하면 훨씬 늘어난다.

임영상 한국외대 교수는 "고려인 가운데 1935∼1938년생이 드문 것은 혹독한 강제이주를 겪으며 특히 갓난아기가 많이 죽어 나간 탓"이라고 설명했다.






◇ 아무런 보상도 없어…스탈린 사후 감시·차별 중단

1937년 12월 5일 문서에는 카자흐스탄에 2만141가구 9만5천427명, 우즈베키스탄에 1만6천79가구 7만3천990명, 타지키스탄에 13가구 89명, 키르기스스탄에 215가구 421명 등 총 3만6천448가구 16만9천927명이 강제이주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카자흐스탄에 배치된 고려인 중 500여 가구는 이듬해 초 러시아 아스트라한 지역으로 재이주됐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이어 급한 대로 눈보라를 피했다. 가져온 양식은 금세 동이나 긴 겨울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그래도 볍씨를 비롯한 곡물과 채소 종자만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황무지를 논밭으로 일궈 뿌렸다.

중앙정부가 극동 지역 인민위원회에 전달한 문서에는 고려인들이 남겨둔 동산과 부동산에 대해 보상할 것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인민위원회에도 고려인 이주민에 대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 당국은 보상과 지원은커녕 일본과 같은 적성(敵性)국민으로 낙인찍어 고려인을 탄압했다. 고려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못했고 치안기관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민족학교도 폐쇄되고 정계나 공직 진출에도 제한받았다. 고려인에 대한 감시와 차별은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중단됐다.



◇ 1993년 강제이주 불법성 인정으로 명예회복

스탈린 정권이 왜 강제이주를 명령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공식 문서에는 '극동 지역에서 일본 간첩 행위의 침투를 막기 위해'라고 기록돼 있다. 러시아인들은 고려인과 일본인을 분간하지 못했고, 실제로도 일본이 조선인 앞잡이들을 스파이로 침투시킨 사례가 있다. 또 소련이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면 고려인들이 일본 편을 들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는 고려인으로서는 이 같은 소련의 인식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는 표면적 이유에 지나지 않고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노동력이 부족한 중앙아시아를 개발하기 위해 농사에 뛰어난 고려인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표적이다.

이창주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는 "고려인이 신문을 내고 학교를 세우고 정치결사체를 조직해 군사화까지 꾀한 것이 강제이주 명령을 내린 가장 주요한 배경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부영 전 국회의원(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독일 나치 정권의 군사적 위협이 노골화하고 일본이 중일전쟁을 벌이자 고려인이 접경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 안보 불안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 격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최고회의는 1993년 4월 '러시아 고려인 명예회복에 관한 법'을 통과시켜 강제이주가 불법적 조치였음을 인정하고 옛 연고지로 돌아갈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현지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과의 갈등을 우려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강제이주란 말 대신 정주란 표현을 쓰는 게 단적인 사례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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