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③ 이산의 아픔 '현재진행형'

입력 2017-07-21 09:00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③ 이산의 아픔 '현재진행형'

불모지에 뿌리내린 놀라운 생명력…자녀교육 힘써 각 분야서 두각

소련 해체후 러시아어 지역으로 재이주…상당수는 다시 연해주로

모국 귀환동포 4만명…법적 미비로 4세 자녀 성인되면 한국 떠나야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937년 연해주에서 뿌리째 뽑혀 중앙아시아에 내던져진 고려인들의 생명력은 놀라웠다.

농기구도 제대로 없었으나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물길을 내 논을 만들었다. 중앙아시아에 벼농사가 자리 잡은 것은 전적으로 고려인들이 이뤄낸 성과다. 고려인들은 다른 곡물과 채소 재배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말 그대로 불모지에 다시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고 열매까지 맺은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는 쌀과 목화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린 공로로 두 차례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다. 그가 일했던 북극성 콜호스(집단농장)는 소련 최고의 모범 농장으로 꼽혔고, 1974년 그가 숨지자 업적을 기려 '김병화 콜호스'로 이름을 바꿨다. 김병화의 성공기는 1956년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도 소개됐다.

카자흐스탄의 김만삼과 우즈베키스탄의 황만금도 빼어난 농업 실적을 거둬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0년대까지 인구 30만 명의 고려인 사회는 201명의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민족 구성원 비율로 볼 때 단연 으뜸이었다.


◇ "고려인은 어디에 가든 학교부터 지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농사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최표덕(최 표트르 이바노비치)은 2차대전 때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적기훈장을 받은 데 이어 평생을 군에 몸담으며 최고 영예인 레닌훈장까지 받았다. 포병부대 지휘관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했던 황동욱과 우크라이나 해방 전투에 참가한 이 발렌티나 니콜라예브나 등도 2차대전 영웅이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고려인 차별정책이 중단되자 학자·교사·의사·엔지니어·법률가·공무원 등 각종 전문직에 활발하게 진출했다. 특히 고려인들은 가난과 고된 노동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자녀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1989년에는 고려인의 도시 거주 비율이 85%에 달했다. 대학 진학률도 25%를 기록해 소련 내 140개 민족 가운데 아르메니아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강제이주 직후 80%에 달하던 농업인구는 12%로 줄고 대부분 도시 거주 중산층이 됐다.

한국외대 임영상 교수는 "고려인은 어디로 이주하든 학교부터 지었고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 교육을 최우선으로 여겼다"면서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이 현지인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교유의 힘이었다"고 설명했다.




◇ 소련 해체로 공용어 바뀌자 공직·전문직서 밀려나

1991년 소련 해체는 또다시 고려인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다. 유일한 공용어 러시아어만 구사하다가 연방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민족어를 공용어로 선포하자 각종 전문직과 공직에서 밀려나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피땀 흘려 이룬 터전을 버리고 다시 살길을 찾아 러시아어 사용 지역으로 떠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선조들이 강제이주 전에 거주했던 '제2의 고향' 연해주를 택했다. '제1의 고향'인 한국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2014년 말 기준으로 구소련권 고려인이 우즈베키스탄에 18만2천957명, 러시아 15만9천419명, 카자흐스탄 10만5천400명, 키르기스스탄 1만7천617명, 우크라이나 1만2천177명, 벨라루스 1천265명, 투르크메니스탄 1천48명, 타지키스탄 634명이 살고 있다. 모국 귀환 동포는 4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 러시아·우즈베크·카자흐에서 성공한 고려인들

러시아에서 성공한 고려인으로는 지난해 9월 이르쿠츠크주에서 연방 하원의원으로 재선된 세르게이 텐을 들 수 있다. 그는 3선의원을 지낸 고려인 2세 유리 텐(한국명 정홍식)의 아들로, 2003년 부친 사망 후 토건회사 트루트를 물려받아 운영하는 한편 2010년 주의원을 거쳐 2011년 하원에 진출했다. 러시아군 소장 출신 유리 엄도 스타브로폴주 부지사와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재계에서는 러시아 100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은행가 이고리 김, 전자결제시스템 운영회사 키위의 대표 보리스 김, 산업용 펌프설비 생산업체 기드로마슈세르비스의 이사회 의장 게르만 최 등이 꼽힌다.

학계 인물로는 하바롭스크국립대 엘레나 강, 국립공업수산대 총장을 지낸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김, 과학공훈자 작위를 받은 물리학자 유리 안드레예비치 홍 등이 대표적이다. 대중문화계에서는 여성 가수 아니타 최가 인기를 끌고 있고, 언론계에서는 마리아 김이 최대 TV방송 라시야의 뉴스 앵커로 활약 중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상원의원이자 국영항공사 대표인 발레리 정이 성공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1992년 카리모프 대통령이 처음 방한할 때 특별기를 조종해 눈길을 모았다. 타슈켄트 고려인문화협회장 박 빅토르는 2015년 고려인 출신으로는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비탈리 편은 1996년부터 17년간이나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로 재임했다.

카자흐스탄 정계에서는 카자흐고려인협회장 김 로만 하원의원,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 게오르기 상원의원, 채 유리 전 상원의원 등이 활동하고 있다. 구리 생산업체 카작무스의 회장 김 블라디미르는 카자흐스탄 최대 갑부로 꼽힌다.

스포츠 스타로는 2013년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싱글 준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 소치 동계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데니스 텐을 들 수 있다. 그는 구한말 의병장 민긍호의 고손자다. 프로권투 WBA·WBC·IBF·IBO 미들급 통합 챔피언으로 무패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게나디 골로프킨도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 "4세도 동포로 인정해야"…관련법 개정 목소리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4만여 명 가운데 경기도 안산에 7천여 명,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3천5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외모가 한국인과 똑같으면서도 한국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허드렛일에 종사하고 있다.

현행 '고려인 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고려인특별법)은 '구소련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를 지원 대상으로 규정해 국내 귀환 고려인은 제외된다. 또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 시행령은 동포 3세까지만 인정해 동포 4세는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국내 귀환 고려인은 특별법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동포 4세 자녀가 성인이 되면 출국시켜야 한다.

이에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비롯해 여러 의원이 국내 귀환 고려인 지원을 위한 법률 제·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현재 국내의 미성년 고려인 4세는 1천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인 지원 단체들로 구성된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기억과 동행위원회'는 지난달 광화문 국민인수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해 ▲고려인특별법 대상에 국내 체류 고려인 포함 ▲고려인 4세 추방 중단을 위한 재외동포법 개정 ▲국내 체류 고려인에 의료보험 혜택 부여 ▲고려인 정착 지원 정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기억과동행위 상임대표인 도재영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은 "고려인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직간접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의 후손인데 이들에게 또다시 이산의 아픔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면서 "법률 개정 운동과 함께 강제이주 진상 규명과 고려인 명예 회복, 국내 정착 지원과 환경 개선 등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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