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있고 가해자는 없고…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 영구미제

입력 2017-07-18 14:52  

피해자는 있고 가해자는 없고…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 영구미제

단순 교통사고 처리, 첫 단추부터 삐걱…유족 '풀리지 않는 한'




(대구=연합뉴스) 류성무 김용민 기자 = 19년 전 대구에서 발생한 여대생 정은희(당시 18세·대학 1년)양 성폭행 사망사건이 사실상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대법원은 18일 이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K(51)씨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1, 2심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했다.

이 사건은 사고 현장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서 정양 속옷이 발견되는 등 특이점을 보였지만 발생 초기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10여 년이 지나서 K씨가 다른 성범죄로 붙잡혀 재수사가 시작돼 검찰이 태스크포스까지 구성해 혐의 입증에 주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죄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정은희 양은 1998년 10월 17일 새벽 대학 축제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대구 달서구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23t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경찰은 교통사고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다가 두 달여 뒤인 그해 12월 말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다.

유족은 끈질기게 재수사를 요구했다.

경찰은 이듬해 3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양 속옷 감정을 의뢰하고 사실상 재수사에 나섰지만, 정양 속옷에서 나온 유전자(DNA) 주인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수사기록은 15년가량 먼지를 덮어쓴 채 경찰 형사반 창고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다가 2013년 스리랑카인 K씨가 청소년에게 성매매를 권유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묻힐 뻔한 이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K씨 DNA가 정양 속옷에서 나온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 15년간 베일에 싸였던 범인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뒤늦게 범행 증거를 일부 확보한 것은 2010년 시행한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에 따라 K씨 DNA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검찰은 2013년 9월 특수강도강간죄 등을 적용해 K씨를 법정에 세웠다. 이미 2001년과 2005년 각각 스리랑카로 돌아간 공범 2명도 기소 중지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공소시효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와 관련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특수강도강간은 강도를 하는 상황에서 강간 범행을 저지른 경우 등에 성립하는 데, K씨 일행의 강도짓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특수강도강간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국내 거주 스리랑카인 노동자들을 전수조사했다.

이 결과 공범 D의 지인이라고 밝힌 스리랑카인 H씨가 새로운 증인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이 증인이 사건 처음과 끝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증인이라며 '귀인'이라고도 표현하며 의욕을 보였다.

H씨는 1998년 초겨울 무렵 지인 1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D에게서 범행 과정과 전반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이에 검찰은 변경한 공소장에 H씨 증언을 전문진술(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의존한 진술)로 기술했다. 또 그를 항소심 증인으로도 세웠다.

검찰은 증언 등을 바탕으로 공소장을 변경해 정양 사망 직전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변경된 공소장은 정양이 1998년 10월 17일 새벽 K씨 등 스리랑카인 세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달아나다 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에 치여 숨진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특히 K씨 일행이 정양을 만난 상황과 성폭행을 위해 이동한 방법, 피고인 일행이 정양 학생증 등 소지품을 가져간 내용 등 1심 재판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내용을 담았다.

또 K씨 등의 특수강간 외에 특수강도 범행이 함께 이뤄졌다는 정황 증언을 처음 덧붙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H씨 증언에 신빙성이 없고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며 K씨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판결했다.

2심은 "피해자 속옷에서 나온 정액 유전자가 피고인 유전자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감정 결과 등으로 볼 때 피고인이 단독으로 혹은 공범들과 함께 피해자를 강간하는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는 공소시효(10년)가 끝나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도 2년여 심리 끝에 1, 2심과 다르지 않은 판단을 했다.

정양 사망사건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 3명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뒤 고속도로에서 죽음을 맞이한 불행한 일이었다는 부분은 밝혀졌다.

하지만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탓에 성폭행범을 잡았지만, 단죄하지 못하고 실체적 진실은 상당 부분 미제로 남기게 됐다.

tjdan@yna.co.kr yongm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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