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25층 아파트 침수로 나흘째 가동 중단…외출 엄두 못 내
"고층 오르면 땀 범벅 정신 혼미"…찜질방·모텔 전전 하기도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마음 단단히 먹고 19층까지 걸어 올라왔는데 다리가 쑤시고 인대도 늘어난 것 같아. 병나면 당신이 모두 책임져"
25층짜리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 B아파트 관리사무소장 김모씨는 요즈음 온종일 입주민들에게 '욕'을 먹는 게 일이다.
지난 16일 290.2㎜의 폭우가 쏟아진 뒤로 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된 탓이다. 엘리베이터 운행 중단은 20일까지 나흘째 계속되고 있다.
하루 전인 19일 오전에도 한 노인의 푸념 섞인 지청구를 한참 들었다.
쏟아지는 주민들의 원성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김씨는 아침 일찍 청심환을 한 알 먹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지난 16일 허벅지까지 잠길 정도로 빗물이 차오르면서 이 아파트 지하의 기계실은 빗물 저장고로 변했다. 펌프를 가동해 사흘간 빗물을 퍼냈다고 하지만 아직도 바닥에는 빗물이 흥건하다.
전기도 끊겼지만 한국전력이 지난 17일부터 비상 공급에 나서면서 아파트 생활이 가능해졌다. 물론 가스는 아직 공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가동이 중단된 엘리베이터이다. 폭우 때 고장 난 모터를 교체해야 하고 전반적으로 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어진 지 1년이 채 안 된 이 아파트에는 182가구가 입주해 있다. 입주민 중에는 임산부와 어린이가 다른 아파트보다 유달리 많다.
저층에 사는 주민이야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고층 주민들에게는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찜통더위에 집을 나서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끔찍한 일이다.
오는 22일께 엘리베이터 수리가 마무리되는데, 고층 주민 일부는 비 피해가 없는 친척 집이나 인근 모텔, 찜질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머지 주민들은 꼼짝없이 아파트에 갇혀 살고 있다.
11개월 된 아이를 둔 주부 박모(31)씨는 집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집이 8층이어서 계단으로 걸어 다닐 만하지만 아기를 업고 오르내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박씨는 지난 16일부터 아예 외출을 포기하고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있다. 반찬거리나 육아용품은 남편이 퇴근할 때 사 들고 간다.
편안해야 할 삶의 터전이 오도 가도 못하는 '도심 속 섬'이 된 것이다.
2개월 된 딸 아이를 키우는 최모(32)씨는 폭우 하루 뒤인 지난 17일 분유를 탈 따뜻한 물을 구하러 집 밖에 나갔다온 뒤로는 아예 출입문을 나서지 않는다.
가뜩이나 몸도 힘든 데 16층을 내려갔다가 올라온 후로는 다리가 후들거려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쉬고 있는 노인들이 눈에 띈다.
80대 김모씨는 "17층부터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는데, 끝은 안 보이고 숨은 차고 너무 어지러워 쉬고 있다"고 말했다.
집 안에만 있기 너무 답답해 바람이나 쐬러 나간다는 김씨는 아파트 내 경로당에 들렀다가 허탈해했다. 이곳마저 침수돼 한창 청소 중이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주책맞게 내려와 몸이 고생한다"며 "올라갈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하지만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올라가야겠다"고 말했다.
직장에 다니는 30대 이모씨도 "퇴근할 때도 문제지만 25층을 걸어 내려가 회사로 출근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이 들어 일을 못 할 지경"이라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예전이면 낯선 탓에 인사를 안 하고 지나쳤을 같은 동 주민 사이에서는 요즈음 새로운 인사말이 생겼다.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된 탓에 외출이 눈에 띄게 줄었지만 더러 계단에서 마주칠 때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눈인사를 교환하며 "몇 층까지 올라가세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나눈다.
관리사무실 앞에서 쉬고 있던 주부 이모(47)씨는 "찜질방에서 생활하다 집안에 별일 없나 둘러보러 왔는데 18층까지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 위만 쳐다보고 있었다"며 "조속히 평상시 생활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ks@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