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소록도, 오해와 편견이 빚은 비극의 섬

입력 2017-08-05 08:01  

[연합이매진] 소록도, 오해와 편견이 빚은 비극의 섬

(고흥=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곳, 소록도에서 쓰는 말 중에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이라는 말이 있다. 한센병의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 치료 시기를 놓쳐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나병에 걸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닮은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인들은 노역에 시달렸고, 낙태와 정관절제 수술 등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인권은 없었다. 사후에도 검시의 수난을 당했다. 이 때문에 소록도 한센인들은 '3번의 죽음'을 당했다고 말한다. 가족과 생이별로 한 번 죽고, 시신 상태로 해부 당해 두 번 죽고, 화장터에서 불태워져 세 번 죽었다. 한때는 6천여 명의 환자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50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 비인간적인 인권유린의 현장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소록대교를 건너 우회전해 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소록도 주차장이다. 소록도는 관광객 출입 가능 지역과 제한 지역으로 분할됐는데, 관광객은 주차장에서 중앙공원, 한센병박물관까지만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개방한다.

주차장을 지나 병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근심과 탄식이 흘렀다'고 해서 수탄장(愁嘆場)으로 불린다. 1950∼60년대 한센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직원지대의 미감(未感)시설로 보내졌고,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만날 수 있었다. 김유화 문화관광해설사는 "전염을 우려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부모와 자식의 자리는 뒤바뀌었다"며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맞았다"고 말한다.

해안 산책로 끝자락에 있는 '애환의 추모비'와 국립소록도병원 본관을 지나면 중앙공원이다. 중앙공원 입구의 감금실(등록문화재 67호)과 검시실(등록문화재 66호)은 관람객을 숙연하게 한다. 1935년 지어진 감금실은 남과 북에 각각 1동의 건물을 나란히 짓고 두 건물 사이를 회랑으로 연결했다. 환자를 외부와 철저히 격리하기 위해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쌓았다.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체벌과 금식, 감식 등의 징벌을 받았다. 환자들은 법에 보장된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인권을 유린당했다. 일제강점기 인권유린의 현장인 감금실은 1970년대 이후까지 사용되었다.




감금실에서 나온 환자들은 무조건 바로 검시실로 보내졌다. 살아나온 환자는 강제로 생식기능을 없애는 단종수술(斷種手術)을 받아야 했고, 사망자는 가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해부를 당했다. 시신은 바닷가에 있는 화장터에서 처리됐다. 시신을 올려놓았던 수술대, 세척 시설 등이 인권유린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젊은 나이에 정관수술을 받은 이동이란 사람의 '단종대'란 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일본인 원장의 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단종대에 올랐던 젊은이의 심정을 생각하며 한센인의 '한'(恨)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솔송나무, 황금편백, 공작편백, 실편백, 당종려, 태사목, 섬잣나무 등 갖가지 나무와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진 곳으로 마치 수목원에 온 듯하다. 일제는 한센인들에게 벌목부터 석재 채취까지 각종 노역을 시켰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는 한센인의 눈물과 땀이 스며 있다.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조성된 공원 곳곳에는 한센인들의 애환이 서린 기념물들이 있다. 중앙공원의 상징인 구라탑(求癩塔)은 오마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국제워크캠프단이 1963년 세운 기념탑이다. 미카엘 대천사가 나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탑은 공원에 우뚝 서서 '한센병은 낫는다'고 웅변하고 있다.

구애탑 뒤편의 세마공적비는 먹먹했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43년간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보살피며 사랑을 실천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세 명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비다. 지난 4월 개봉된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 청춘을 소록도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한 간호사 두 분의 봉사 정신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공원 한편의 벽돌공장 터에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소록도 방문 기념탑이 서 있고, 벽돌공장 굴뚝 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때는 굶주림을 견디며 매일 수만 장의 벽돌을 구워내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해방 전까지 송진 채취, 가마니 생산, 숯 생산 등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됐다.







◇ 한센인 恨 서린 오마도 간척지



한센인에게는 해방이 오지 않았다. 한센병 환자들은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을 연결한 모양이 말(馬)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오마도(五馬島) 간척사업에 동원됐다. 한센인들은 소록도를 떠나 육지에서 살 수 있다는 열망 하나로 1962년부터 삽과 곡괭이로 섬을 허물어 등짐으로 돌멩이를 날라 바다를 메웠다.

하지만 2년여에 걸친 물막이 공정이 80% 이상 진척된 1964년 7월, "나환자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뭍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는 중단됐고, 한센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사업주체가 전라남도와 고흥군 등으로 바뀌면서 1988년 말 완공됐다.

소록도에서 약 12㎞ 떨어진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는 당시 한센인의 고된 노동 장면을 새긴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한센인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오마도 간척지와 소록도가 한눈에 보인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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