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리스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여㎞ 떨어진 우수리스크의 보로다로소코 38번지.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말년에 살았던 흰색의 1층 양옥집이 지난 23일 오후 모처럼 80여 명의 단체 방문객을 맞았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의 탐사단 일행이 블라디보스트코역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6천500㎞의 대장정을 떠나기에 앞서 그의 집을 찾은 것이다.
현재 이 집은 내년 4월 최재형 기념관으로 꾸며져 관람객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러시아인의 손에 넘어가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던 것을 2014년 재외동포재단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사들였으나 자금 문제 등으로 리모델링을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서 공사를 시작했다. 탐사단원들은 안에 들어가지는 못한 채 담장 너머로 공사 장면을 지켜봐야 했지만 새로 단장된 그의 집에 유품과 사료들이 전시되는 광경을 그리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다.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운동에 헌신하며 '고려인들의 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꼽히던 그가 왜 이처럼 뒤늦게 알려지고 최근에야 그를 기리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일까. 남북 분단과 이념 대결 탓으로만 돌리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회한과 반성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은 1869년 7월 홍수로 인한 '기사흉년'이 닥치자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첫 한인 정착지인 연해주 포시에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로 이주했다. 인근 연추(煙秋·얀치헤) 마을로 옮겨가 러시아 학교를 다니던 중 어려운 가정형편을 비관해 가출했다. 11살 때부터 포시에트 항구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선장 부부의 귀여움을 받아 6년 동안 상선을 타고 전 세계를 누볐다. 선장 부부의 권유로 표트르 세메노비치란 러시아식 이름도 얻었고 정교회 세례도 받았다. 이때 익힌 러시아어와 얻은 견문은 그의 큰 자산이 됐다.
1877년 무역회사에 들어가 실무를 배운 뒤 러시아군의 통역으로 활동하다 군납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고려인들의 농장에 목축을 장려해 러시아군에 채소와 함께 돼지와 달걀 등을 공급했고, 정부가 발주하는 도로나 철도 공사에도 고려인 인부들을 데리고 참여했다. 1884년 6월 조러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로 귀화했다. 그가 번 돈과 구축한 현지인 네트워크는 훗날 연해주 독립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최재형은 러시아 정부의 신임을 얻어 1893년 연추의 도헌(군수)으로 임명됐다. 1896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도 참석하고 러시아 정부의 훈장도 받았다. 그래도 고려인과 모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30여 곳의 학교를 세우고 목축을 장려하는 등 고려인 계몽과 가난 퇴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이었다. 개화파 박영효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6개월간 머물던 중 이 소식을 접하고 그동안 번 돈과 남은 생을 국권회복 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국내의 우국지사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의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몰려오고 있었다. 최재형은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자리 잡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특사로 가던 이상설과 이준이 연추에 있던 그의 집에 머물렀고, 안중근도 1909년 거사를 앞두고 이곳에서 최재형이 구해준 권총으로 사격 훈련을 했다. 그에 앞서 최재형은 1908년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등과 함께 항일단체 동의회를 결성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안중근은 동의회 의병부대 무관이었다.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사살 계획에 참여한 우덕순도 회원이었다. 1911년에는 이상설 등과 권업회를 조직해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1917년 결성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데 이어 1919년 3·1운동 후 출범한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에 임명됐다가 대한국민의회가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자 재무총장으로 선임됐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연해주를 근거지로 삼은 독립운동 세력의 활발한 항일투쟁은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을 불렀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과 5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과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밀집 지역을 습격해 독립운동가들을 사살하고 가옥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4월 참변'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 때 우수리스크에 살던 최재형도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으나 그가 교과서나 일반 역사책에 그 이름이 실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2007년 4월 7일 모스크바에 사는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틴은 최재형이 총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리스크 감옥 뒤편 언덕에서 87년 만에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렸다. 최 발렌틴은 2016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그에 앞서 재외동포재단은 2014년 최재형이 살던 집을 매입하는 데 힘을 보탰다.
2011년 최재형의 인재 양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최재형장학회가 창립됐다. 해마다 국내외 고려인 대학생 1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2015년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로 이름을 바꿨다. 2012년부터 최재형 추모식을 국내에서 열고 있으며 순국 95주년이자 광복 70주년인 2015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부인인 최엘례나(1952년 사망)와 함께 위패를 봉안했다. 그래도 그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해외이민사에 쌓은 공적을 생각하면 한참을 못 미친다. 훈장이나 위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과 동포 모두 그를 기억하고 그의 행동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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