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정원 직원들에게 각종 선거와 언론 조작 개입을 지시한 정황이 담긴 문건이 공개됐다. 원 전 원장의 파기 환송심 공판에서 검찰이 새 증거로 제출한 문건은, 원 전 원장이 재임 중 주재한 간부회의 내용을 정리한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 녹취록'이다. 2013년 국정원이 검찰에 자료를 제출하며 보안을 이유로 삭제했던 대목을 복구한 것이다. 이 녹취록을 보면 원 전 원장은 정치적 중립을 견지해야 할 정보기관 수장으로서 본분을 잊은 채 노골적으로 보수 후보 물색과 지원을 지시하고 언론통제도 주문했다. 또 노조문제에 개입하거나 보수단체 지원에 나서도록 하는 한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좌파세력을 이길 수 있는 심리전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원 전 원장은 19대 총선을 5개월여 앞둔 2011년 말 회의에서 지부장들에게 보수 여권 후보의 '교통정리'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또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1년 앞두고는 "우리 지부에서 후보를 잘 검증해야 한다"면서 "1995년 선거 때도 구청장 본인이 원해서 민자당 후보로 나간 사람 없고, 국정원에서 다 나가라 해서 한 거지"라며 노골적인 선거개입을 암시했다. 그는 언론에 대해서도 "기사 잘못 쓴 보도 매체를 없애버리든지 공작을 하는 게 여러분이 할 일", "잘못할 때마다 (언론을) 쥐어패는 게 정보기관의 역할" 등 극단적 발언을 해 매우 편향된 인식을 드러냈다. 또 "대북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라면서 좌파에 점령당한 SNS 여론의 주도권 확보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보수단체는 운영비와 사무실 등을 지원해 육성해야 한다면서 "꼬리를 안 잡히는 게 정보기관"이라며 보안 유지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 녹취록은 이명박 정권 당시 국정원 수뇌부가 정치와 선거 등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이런 행위를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반 헌법 행위"로 규정하고 "준엄한 사법적 판단이 필요하다"며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도 이 회의 녹취록과 국정원이 작성한 13개 문건을 증거로 채택했다. 8월 30일로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이 증거들이 재판부의 유무죄 판단과 유죄 형량 산정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아진 것 같다. 아울러 이명박·박근혜 두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정치불개입 원칙에서 후퇴한 국정원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전날 국회 청문회에서, 검찰이 2012년 국정원의 정치개입 정황이 담긴 문건을 확보하고도 원세훈 재판에 증거로 쓰지 않고 청와대에 반환했다는 의혹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그치지 말고 이번에 증거로 채택된 녹취록 등이 재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녹취록 외에 전직 청와대 행정관 집에서 압수된 'SNS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 문건 등 원 전 원장의 선거개입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이 녹취록은 새 정부 들어 활동을 시작한 국정원의 적폐청산 태스크 포스(TF)에 의해 복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TF에서 다른 유력한 증거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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