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⑬ 정지영 감독 "뿌리찾기는 숙명"
카자흐로 유배된 여성 독립운동가 주세죽 일대기 영화화 구상
"고려인의 꿈 위해 통일해야" "삼례 살인사건 영화 곧 크랭크인"
(노보시비르스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80년 전 중앙아시아로 끌려가 혹독한 고생을 하고 2차대전에까지 참전하며 겨우 터전을 잡았는데, 소련 해체 후 민족주의가 대두해 소외당하고 배척받으니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정체성 고민을 하며 뿌리를 찾아 나서려고 하지 않겠어요? 인간의 본능이고 숙명이겠죠."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길을 따라가는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에 탑승한 정지영(71) 영화감독은 80년 동안 맺힌 고려인의 한을 풀어주려면 남북한이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역설했다.
23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회상열차 탐사단은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독립 유적을 답사하고 이튿날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랐지만 정 감독은 사흘 뒤인 26일 항공편으로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27일 합류했다.
탐사단은 28일 다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탑승해 이틀을 더 달린 뒤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카자흐스탄행 열차로 갈아탔다. 그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향하는 길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 뒤늦게 합류한 까닭은 무엇인가.
▲ 지난해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부천영화제 폐막식은 21일 열렸지만 상영 일정이 23일 끝났다. 영화제가 마무리되기 전에 조직위원장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 회상열차에 동행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 출발하기 어렵다고 얘기했다.
--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본 적이 있는가.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타고 간 적이 있다. 6천500㎞의 강제이주 루트 가운데 못 가본 길을 이번에 답사하는 셈이다.
-- 그때 바이칼호도 봤는가.
▲ 2012년 겨울이었는데 백기완 선생과 동행했다. 무용가 이애주 씨가 체르스키전망대에서 감동적인 즉흥 춤을 췄다. 꽁꽁 언 물에 눈이 덮여 벌판인지 호수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여름 바이칼호를 보고 싶었는데 소망을 이뤘다.
-- 이번 대장정이 다음 영화 구상과 관련이 있는가.
▲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헌영과 김단야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주세죽(1901∼1953)의 일대기를 그리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와 맞서 싸웠는데도 일제의 밀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고 1938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유형 생활을 하다가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회상열차 탐사단은 크질오르다를 방문하지는 않지만 주세죽이 끌려간 행로를 따라가며 그의 심경을 생각했다.
-- 주세죽은 2007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긴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 당시에도 "빨갱이에게 훈장이 웬말이냐"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직도 이념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그의 삶을 스크린에 옮기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 지난해 손석춘의 소설 '코레예바의 눈물-여성사회주의자 주세죽의 슬픈 이야기'를 명필름이 영화화하자고 제안했다. 주변에서는 정권교체 덕분에 영화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한다. 명필름과 함께 님 웨일스 원작 '아리랑'을 토대로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영화로 꾸미려다가 중국 당국의 불허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사례가 있어 이번에도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른다. 국내 관객 사이에서 논란이 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념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제한돼서는 안 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이 정도 소재를 포용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 1981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년)나 '블랙잭'(1997년)도 만들었지만 '남부군'(1990년), '하얀 전쟁'(1992년), '부러진 화살'(2012년), '남영동 1985'(2012년)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를 많이 연출했다.
▲ 특별히 어떤 장르나 특정 소재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가 요구하고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할 뿐이다. 다만 영화는 감독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런 흐름과 주위 여건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었고 내 필모그래피를 만든 것이다.
-- 영화 연출 말고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 등 영화 관련 현안 해결에 앞장서고 사회적 이슈에도 목소리를 내는 '현실 참여파 영화인'으로 꼽힌다.
▲ 영화감독의 본분은 영화를 잘 만드는 것이지만 영화를 잘 만들려면 주변 여건을 개선하는 일도 필요하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젠 나도 그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 나 말고도 다른 감독들이 이런 문제에 더 많이 기웃거리면 내가 안 해도 될 텐데 그런 감독이 많지 않다.
--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영화감독 이창동과 영화배우 문성근이 각각 문화관광부 장관과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번 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생각이 있는가.
▲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여러 차례 권유를 받았지만 난 공직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해 고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해서 집권세력에 참여해 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참여하면 비판하기 힘들다. 영화감독의 본분은 감시하고 풍자하는 것이다.
-- 고려인 강제이주의 길을 따라가는 소감은 어떤가.
▲ 열차를 타고 가며 고려인들의 심경을 떠올려봤다. 낯선 중앙아시아에서 황무지를 손으로 일궈 어렵게 터전을 마련하고, 2차대전에까지 참전하며 소련 국민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연방 소속 공화국들이 독립하며 민족주의가 대두해 따돌림을 받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카자흐, 우즈베크인도 아닌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정체성 고민을 하다가 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작 조국은 분단된 상태로 있으니 답답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통일은 전 세계에 흩어진 재외동포에게 더 절실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달라.
▲ 주세죽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이미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두어 개 있다. 살인죄 혐의가 인정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뒤늦게 진범이 나타나 17년 만에 누명을 벗은 1999년 삼례 슈퍼마켓 살인사건 이야기를 영화로 꾸미려고 한다. 시나리오가 거의 완성됐으며 올해 안에 크랭크인한다. 세조 때의 한 사건을 영화화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카자흐로 유배된 여성 독립운동가 주세죽 일대기 영화화 구상
"고려인의 꿈 위해 통일해야" "삼례 살인사건 영화 곧 크랭크인"
(노보시비르스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80년 전 중앙아시아로 끌려가 혹독한 고생을 하고 2차대전에까지 참전하며 겨우 터전을 잡았는데, 소련 해체 후 민족주의가 대두해 소외당하고 배척받으니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정체성 고민을 하며 뿌리를 찾아 나서려고 하지 않겠어요? 인간의 본능이고 숙명이겠죠."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길을 따라가는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에 탑승한 정지영(71) 영화감독은 80년 동안 맺힌 고려인의 한을 풀어주려면 남북한이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역설했다.
23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회상열차 탐사단은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독립 유적을 답사하고 이튿날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랐지만 정 감독은 사흘 뒤인 26일 항공편으로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27일 합류했다.
탐사단은 28일 다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탑승해 이틀을 더 달린 뒤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카자흐스탄행 열차로 갈아탔다. 그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향하는 길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 뒤늦게 합류한 까닭은 무엇인가.
▲ 지난해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부천영화제 폐막식은 21일 열렸지만 상영 일정이 23일 끝났다. 영화제가 마무리되기 전에 조직위원장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 회상열차에 동행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 출발하기 어렵다고 얘기했다.
--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본 적이 있는가.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타고 간 적이 있다. 6천500㎞의 강제이주 루트 가운데 못 가본 길을 이번에 답사하는 셈이다.
-- 그때 바이칼호도 봤는가.
▲ 2012년 겨울이었는데 백기완 선생과 동행했다. 무용가 이애주 씨가 체르스키전망대에서 감동적인 즉흥 춤을 췄다. 꽁꽁 언 물에 눈이 덮여 벌판인지 호수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여름 바이칼호를 보고 싶었는데 소망을 이뤘다.
-- 이번 대장정이 다음 영화 구상과 관련이 있는가.
▲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헌영과 김단야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주세죽(1901∼1953)의 일대기를 그리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와 맞서 싸웠는데도 일제의 밀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고 1938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유형 생활을 하다가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회상열차 탐사단은 크질오르다를 방문하지는 않지만 주세죽이 끌려간 행로를 따라가며 그의 심경을 생각했다.
-- 주세죽은 2007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긴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 당시에도 "빨갱이에게 훈장이 웬말이냐"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직도 이념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그의 삶을 스크린에 옮기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 지난해 손석춘의 소설 '코레예바의 눈물-여성사회주의자 주세죽의 슬픈 이야기'를 명필름이 영화화하자고 제안했다. 주변에서는 정권교체 덕분에 영화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한다. 명필름과 함께 님 웨일스 원작 '아리랑'을 토대로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영화로 꾸미려다가 중국 당국의 불허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사례가 있어 이번에도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른다. 국내 관객 사이에서 논란이 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념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제한돼서는 안 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이 정도 소재를 포용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 1981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년)나 '블랙잭'(1997년)도 만들었지만 '남부군'(1990년), '하얀 전쟁'(1992년), '부러진 화살'(2012년), '남영동 1985'(2012년)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를 많이 연출했다.
▲ 특별히 어떤 장르나 특정 소재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가 요구하고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할 뿐이다. 다만 영화는 감독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런 흐름과 주위 여건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었고 내 필모그래피를 만든 것이다.
-- 영화 연출 말고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 등 영화 관련 현안 해결에 앞장서고 사회적 이슈에도 목소리를 내는 '현실 참여파 영화인'으로 꼽힌다.
▲ 영화감독의 본분은 영화를 잘 만드는 것이지만 영화를 잘 만들려면 주변 여건을 개선하는 일도 필요하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젠 나도 그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 나 말고도 다른 감독들이 이런 문제에 더 많이 기웃거리면 내가 안 해도 될 텐데 그런 감독이 많지 않다.
--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영화감독 이창동과 영화배우 문성근이 각각 문화관광부 장관과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번 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생각이 있는가.
▲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여러 차례 권유를 받았지만 난 공직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해 고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해서 집권세력에 참여해 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참여하면 비판하기 힘들다. 영화감독의 본분은 감시하고 풍자하는 것이다.
-- 고려인 강제이주의 길을 따라가는 소감은 어떤가.
▲ 열차를 타고 가며 고려인들의 심경을 떠올려봤다. 낯선 중앙아시아에서 황무지를 손으로 일궈 어렵게 터전을 마련하고, 2차대전에까지 참전하며 소련 국민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연방 소속 공화국들이 독립하며 민족주의가 대두해 따돌림을 받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카자흐, 우즈베크인도 아닌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정체성 고민을 하다가 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작 조국은 분단된 상태로 있으니 답답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통일은 전 세계에 흩어진 재외동포에게 더 절실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달라.
▲ 주세죽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이미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두어 개 있다. 살인죄 혐의가 인정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뒤늦게 진범이 나타나 17년 만에 누명을 벗은 1999년 삼례 슈퍼마켓 살인사건 이야기를 영화로 꾸미려고 한다. 시나리오가 거의 완성됐으며 올해 안에 크랭크인한다. 세조 때의 한 사건을 영화화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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