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안 속아'…뛰는 보이스 피싱에 나는 시민

입력 2017-08-01 10:10  

'이제는 안 속아'…뛰는 보이스 피싱에 나는 시민

보이스 피싱 수난시대…속는 척 기지 발휘해 범인 검거 공

피해규모 1년 새 21.5% 감소…"전화로 돈 요구하면 바로 신고해야"

(성남=연합뉴스) 강영훈 기자 = 이쯤 되면 '보이스 피싱'(전화 금융사기)의 수난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과거처럼 손쉽게 보이스 피싱이 먹혀들지 않는다. 되레 보이스 피싱의 표적이 된 시민이 놓은 '함정'에 빠져 쇠고랑을 차는 일도 허다하다.

지난달 21일 오전 7시 40분께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A(61)씨 집으로 KT 직원이라는 사람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최근 전화를 개통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그는 "당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곧 금융감독원에서 전화가 갈 것"이라고 A씨를 압박했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전화 상대방의 우리말 발음은 정확했으나, 아침 일찍부터 KT에서 이런 전화를 걸 리가 없다고 생각한 A씨는 보이스 피싱을 의심하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A씨의 의심은 딱 맞아 떨어졌다.

뒤이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자신을 금감원 직원이라고 소개하면서 "예금을 보호하려면 모든 돈을 찾아 집 우편함에 넣어두라"며 "그런 뒤 집에 들어가 있으면 사이버팀 형사들이 가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수법의 보이스 피싱 수법을 언론을 통해 수차례 접한 바 있는 A씨는 이때부터 깜빡 속아 넘어간 듯 어눌한 말투로 연기를 시작했다.

우선 A씨는 집 근처의 한 빌라 '○○'동 '○○'호를 자신의 주소라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모두 찾아 1층 우편함에 넣어 놓겠다고 답해 보이스 피싱 조직의 모든 지시를 따르는 듯이 행동했다.

무엇보다 디테일을 살렸다.

A씨는 예금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보이스 피싱 조직원의 질문에 처음에는 "3천100만원이 있다"고 했다가 "은행에 와서 보니 잔금이 2천870만원 뿐이다. 어쩌면 좋겠느냐"면서 범인들을 쥐락펴락했다.

또 차량 조수석 서랍을 열고 신문지 뭉치를 넣은 뒤 다시 닫는 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들려줌으로써 마치 빌라 우편함에 돈을 넣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A씨를 완벽히 속인 줄 안 이 조직 인출책 이모(24·중국 국적)씨는 돈을 챙기기 위해 빌라 우편함에 다가섰다가 먼저 와 잠복 중이던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절도 혐의로 이씨를 구속해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

이씨는 지난 6월 말부터 한 달여간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은 피해자 6명이 우편함이나 집 안 세탁기에 넣어둔 돈 1억 6천여만원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보이스 피싱 조직을 속이는 등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이라 포상금 지급을 검토하고 있다"며 "최근 성남에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수사 중이었는데, 이날 오전 내내 A씨와 계속 연락하면서 추적한 덕분에 손쉽게 이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보이스 피싱의 대상이 된 시민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 우편함에 넣는 등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범인 검거에 공을 세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해 4월 전북 김제에서는 70대 노인이 돈을 모두 찾아 집 안 냉장고에 보관하라는 전화를 받고 은행과 경찰에 알린 뒤, 지시대로 따르는 듯이 행동하면서 보이스 피싱 조직원을 붙잡는 데 일조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서울의 택시기사가 손님으로 태운 보이스 피싱 조직원의 전화 통화를 듣고 이를 경찰에 신고, 검거에 힘을 보탰다.




많은 시민이 보이스 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가 오면 전화를 끊어버리기 일쑤지만, 되레 전화 건 상대를 조롱하는 경우도 있다.

보이스 피싱 전화에 속고 있는 것처럼 대화하면서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박장대소하는 대화 내용이 담긴 음성 파일이나 동영상은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웃기는 보이스 피싱으로 잘 알려진 '오명균 수사관'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월 검거된 중국 보이스 피싱 조직원 유모(28)씨는 2015년 4월 한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서울중앙지검 오명균 수사관이라고 소개했으나, 상대방은 이런 일이 빈번한 듯 "왜 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며 폭소를 터뜨렸다.

머쓱해진 유씨도 사기 행각을 포기하고 "아∼ 겁나 웃겨"라면서 함께 웃었다.

양측이 전화를 끊으면서 키득대는 소리까지 담긴 이 음성 파일은 50여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이용됐다', '개인정보가 유출돼 위험하다'는 등의 어설픈 수법이 더는 통하지 않으면서, 보이스 피싱 범죄가 줄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 피싱 피해 금액은 1천919억원으로 2015년 2천444억원보다 21.5% 감소했다.

금감원은 2015년 4월 보이스 피싱을 민생침해 5대 금융악으로 규정하고 전방위적 홍보를 한 결과 시민들의 대처능력이 제고되며 피해규모가 준 것으로 분석했다.

다만 보이스 피싱이 수사기관 등을 사칭하는 '정부기관 사칭형'에서 금융회사 대출 광고전화를 가장한 '대출빙자형'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어 여전히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실제로 피해 금액 비중으로 보면, 정부기관 사칭형이 2015년 57.3%에서 지난해 30.2%로 많이 줄어든 반면 대출빙자형이 같은 기간 42.7%에서 69.8% 급증했다.

경찰은 보이스 피싱이 시시각각 진화하는 만큼, 누군가 전화상으로 돈 입금을 요구하는 경우 곧바로 신고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경찰 관계자는 "'돈을 찾아 냉장고에 넣어두라'는 식의 보이스 피싱에 속는 사람이 줄어들자 신용등급을 높여주겠다거나 급전을 싸게 빌려주겠다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나타나고 있다"며 "전화상으로 돈 입금을 요구하면 보이스 피싱을 의심하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ky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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