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은인이자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의 은사였던 류빙(劉氷) 전 칭화(淸華)대 부서기의 장례식장에 중국 정가의 미묘한 입장차가 나타났다.
1일 중국 신경보(新京報)의 웨이신(微信) 계정 '정스얼'(政事兒)에 따르면 1975년 문화대혁명 말미에 교육개혁 주장으로 유명한 류 전 부서기가 지난달 24일 베이징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지난달 30일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 빈의관에서 치러진 영결식에는 시 주석을 비롯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모두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
모두 1천여명이 참석한 영결식은 '일개 노인'의 사망 치고는 매우 성대하고 장중하게 진행됐다고 홍콩 봉황망이 전했다.
후 전 주석과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 리란칭(李嵐淸) 전 부총리,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등 퇴직 원로들도 대거 조화 행렬에 합류했다.
하지만 유독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조화만 눈에 띄지 않았다고 '정스얼'은 전했다.
류빙 영결식은 19차 당 대회를 앞둔 권력재편 과정에서 칭화대 동문인 시 주석과 후 전 주석의 연대 관계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면서 이 같은 권력의 틀을 전·현직 지도자들이 대거 용인하고 있는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장 전 주석만은 여전히 시·후 연대세력을 견제하며 불만을 품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장 전 주석의 측근 쩡칭훙 전 부주석도 별다른 인연이 없는 류빙의 영결식에 조화를 보냈다.
류빙은 항일전쟁 시기 공산당 지하공작에 참가하고 신중국 성립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전신에 배속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조수 역할을 하다 1956년부터 1978년까지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의 칭화대 당위원회 부서기를 맡은 인물이다.
칭화대에 다니던 시기의 시 주석, 후 전 주석과 모두 인연이 있으며 이후 간쑤(甘肅)성으로 옮겨가 란저우(蘭州)대 총장과 부성장,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등을 거쳐 1998년 은퇴했다.
후 전 주석이 1960년대 칭화대 수리공정학과에 재학하면서 정치지도원을 맡고 있을 시기에 류빙은 그의 담당 교사이자 선배로 인연을 맺었다. 간쑤성에서 조우해 함께 일하기도 했으며 후 전 주석의 출사길을 번번히 챙겨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날 즈음 1975년 류빙이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부주석에게 올린 교육개혁 보고서는 옌안(延安) 농촌에 하방 중이던 시 주석이 베이징으로 돌아와 칭화대를 다니게 된 배경이 됐다.
그는 당시 "교육의 질이 떨어져 대학을 졸업한 학생조차 읽고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나 다름없다"며 문혁의 극좌파 교육이 중국을 망치고 있다고 비판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를 전해받은 마오쩌둥(毛澤東)이 다시 반(反)우파 논쟁을 일으키며 막 복권된 덩샤오핑이 또다시 실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당시 옌안지역에 단 2명의 정원만 배정된 상황에서 류빙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칭화대 합격증을 받았다. 문혁 시기 대입시험인 가오카오(高考)가 중단돼 있고 부친인 공산당 원로 시중쉰(習仲勳)이 아직 문혁 복권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 주석은 2011년에 작성한 '자술'이라는 자기소개서에 당시의 일화를 전하며 류빙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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