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적 대통령 문화 청산" 취임 일성…'눈높이 맞추기' 악수·셀카
현충일 추념식 옆자리 4부요인 대신 유공자…눈물 흘린 5·18 유족 꼭 안아줘
국민들 호평, 지지율로 나타나…'정책 뒷받침 안되면 보여주기식 전락' 충고도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국가 원수로서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던 지난 8일 청와대인왕실.
본격적인 면담에 앞서 문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 조순미씨의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그의 눈을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문 대통령은 어디서든 국민과 얘기할 때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다.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 양천구 은정초등학교를 찾았을 때 한 초등학생이 사인을 해달라며 가방을 바닥에 놓고 종이를 꺼내는 동안 문 대통령은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확실히 낮아졌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0일이 되는 동안 추진했던 각종 정책이 이전 정부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만, 특히 문 대통령의 탈권위 행보는 단순한 파격 이상이라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 대통령의 소통 행보는 불통과 권위로 상징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교되면서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어 결과적으로 개혁정책을 더욱 탄탄히 뒷받침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의 탈권위·소통 드라마는 5월 10일 취임 첫날부터 막을 올렸다.
외국 정상들을 초청해 수천 명 앞에서 거행한 그간의 화려한 취임식 대신 국회 로비에서 '작은 취임식'을 하면서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한 게 서막이었다. 문 대통령은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자연스레 국민과의 스킨십으로 이어졌다.
취임식을 마친 뒤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악수하는가 하면 시민들의 셀카 요청에도 빠짐없이 응했다. 청와대 관저 정비로 잠시 머문 홍은동 자택에서 청와대로 출근할 때도 주민들이 부르면 어김없이 차에서 내려 손을 잡았다.
대통령이 사전에 약속된 동선을 벗어날 경우 경호관들이 진땀을 빼기도 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듯한 모습이다. 시민들이 대통령에게 다가가도 특별히 제지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대통령의 안전을 지키면서 '친근한 경호, 열린 경호, 낮은 경호'를 표방한 것이다.
취임 12일 만인 5월 22일 양산 사저에서 하루짜리 첫 휴가를 보내던 문 대통령이 몰려든 시민들의 요구에 셀카를 찍고, 참모들과 함께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경호 차량 한 대만 수행한 채 부산 모친을 만나러 다녀온 일화도 화제가 됐다. 고급 방탄차량 앞뒤로 수 대의 특수 경호 차량이 수행하고 경찰차가 겹겹이 에워싸던 모습만을 봤던 국민 입장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5월 17일 군 통수권자로서 첫 국방부·합참 방문 시 걸어서 이동할 때 마주친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여군들의 사인 요청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낙연 총리는 문 대통령이 주영훈 경호실장이 곤혹스러워할 정도로 '경호 좀 약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국가기념일 행사장에서 보여준 문 대통령의 모습은 감동을 선사했다.
현충일 추념식에서 통상 4부 요인이 자리했던 대통령 옆자리에 작년 지뢰 사고로 우측 발목을 잃은 공상군경인 김경렬씨와 2년 전 북한의 비무장지대 지뢰 도발 당시 다친 김정원·하정원 국가 유공자가 앉았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압권이었다.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났지만, 그날 아버지가 시위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탓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김소형씨가 추모글을 읽던 도중 울음을 터뜨리자 문 대통령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김씨가 추모사를 마치고 퇴장하려 하자 문 대통령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대로 올라가 김씨를 감싸 안으며 토닥여줬다. '각본에 없던' 이 한 장면은 많은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네티즌들은 열광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문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모습은 화제가 됐다.
취임 이틀째인 5월 11일 참모들과 오찬을 마치고서 셔츠 차림으로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경내를 거닐며 대화를 나눴고, 이튿날에는 청와대 직원식당에서 기술직 직원들과 3천원짜리 점심을 같이했다. 문 대통령은 식권을 내고 배식대에 줄을 서 식판에 음식을 직접 담았다.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식당에서 직원들과 식사를 함께한 것은 처음이었고, 당시 직원들은 믿지 못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6월 9일에도 직원식당을 예고 없이 찾아 함께 식사했다.
회의 석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의에 앞서 직접 커피를 타 마시고, '계급장·받아쓰기·결론'이 없는 '3무(無) 회의'를 지향했다.
참모들과의 수시 소통을 위해 취임 사흘째부터 집무실을 청와대 본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사용하는 비서동인 여민관으로 옮겼다.
취임 한 달 반이 흐른 6월 26일부터는 1968년 1·21 사태를 계기로 막혔던 청와대 앞길을 50년 만에 전면 개방하며 국민의 품으로 돌려줬다. 청와대로 향하는 도로의 검문소 차단막을 전부 없애는 등 청와대를 좀 더 국민과 가까이 뒀다.
집무실을 광화문 일대로 옮겨 권력과 국민의 거리를 좁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문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머무는 춘추관에 세 차례 들러 직접 인사 발표를 하며 인선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 서서 직접 인사를 발표하는 모습은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임명장 수여식을 할 때면 인사 당사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배우자까지 불러 축하 꽃다발을 직접 안겼다.
새 정부 출범 후 인양된 세월호에서 사람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됐다는 연합뉴스 기사에 대한 댓글에 '문변'이란 이름으로 답글을 달며 대통령도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문 대통령은 답글에서 미수습자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모두 함께 기다리고 있다'며 애타는 마음을 드러냈다.
청와대 특수활동비·특정업무 경비를 대폭 삭감하면서 본인과 가족의 식비와 치약·칫솔 등 생활비품비를 사비로 처리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신선했다.
문 대통령의 낮은 행보는 외국에서도 변치 않았다.
지난달 6일 독일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나오던 문 대통령은 총리실 담장 밖에서 교민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메르켈 총리의 양해를 구해 직접 100여m를 걸어가 교민들과 악수하고 격려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메르켈 총리가 환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일련의 낮은 행보는 잇단 인사 파문 등에도 70∼80%라는 고공 지지율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분석된다.
사상 초유의 탄핵 국면을 거쳐 탄생한 대통령인 만큼 이런 행보에 많은 국민이 열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와 안보를 비롯한 정책적인 면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그칠 수 있다는 충고도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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