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폐허」 동인 이래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평생을 한결같이 문학에 바치고 이 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금자탑을 이루어놓은 염상섭 옹(65). 지금 옹은 극심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서울 시내 성북구 삼양동 783의 113 냉냉한 셋방 한 모퉁이에 누운 채 거의 집필을 중단하다시피 하고 있다. 지난 26일 본사 62연도 신춘작품 최종심사에 참석했던 심사위원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돌아가신 다음의 화려한 비석보다도 생전에 약 한첩이라도-' 하며 본사에서 지출된 적은 심사 사례 중에서 저마다 약값을 갹출 본사에 기탁하고 '문단 선배를 돕는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함으로써 삭풍이 불어닥치는 세모 거리의 화제를 모으게 하였다." (동아일보 1961. 12. 30. '문단에 핀 인정의 꽃')
오는 30일로 탄생 120년을 맞는 우리 문단의 거목 염상섭은 말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문단에서는 그를 위한 문병성금모금운동이 전개됐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가 빈곤에 허덕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염상섭 같은 대가가 이 정도였으니 그보다 못한 사람들은 오죽했을 것인가. 작가가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출생했다. 할아버지가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였고, 아버지가 전주, 가평, 의성 등지에서 군수를 지내 어려서는 유복하게 자랐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반일학생으로 지목돼 1909년 보성소학교로 전학했다. 191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도쿄 아사부중학으로 편입했다. 성학원을 거쳐 1915년 교토 부립 제2중학교로 옮겨 1918년 졸업했다. 그해 게이오대학 문과 예과에 들어갔으나 첫 학기를 마치고 병으로 자퇴했다. 그는 줄곧 고학으로 학교에 다녔으며 대학 자퇴 후에는 쓰루가의 작은 신문사에서 약 3개월간 기자로 일했다. 1919년 3월 19일 오사카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려다가 거사 전날 밤 일경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했다. 출옥 후 그해 11월 한글판 성경과 '학지광,' '창조' 등을 인쇄하던 요코하마의 복음인쇄소에 취직했다. 노동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목표로 직공으로 일하며 어렵게 지내던 중 1920년 2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정치부 기자로 발탁됐다. 창간호에 조선 통치에 대한 일본 정계 거물급 인사들의 소감을 취재했는데 신문 12면의 절반 이상이 염상섭이 쓴 기사였다. 그러다가 6월 말 동인지 '폐허'를 출간하기 위해 동아일보를 떠났다.
염상섭은 1921년 개벽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이채로운 작품으로, 염상섭은 3·1 운동 직후 지식인의 심리를 냉철한 시각으로 생물을 해부하듯이 파헤쳐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1920년 형이 교감으로 있던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잠시 재직하던 염상섭은 1921년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최남선이 운영하던 주간 시사잡지 '동명'의 기자로 들어갔다. 1924년 '동명'이 시대일보로 개칭되면서 사회부장을 맡았다. 1922년 '신생활' 7, 8월호에 '묘지'를 연재했으나 잡지의 폐간으로 중단됐다. 그러다가 시대일보가 창간되면서 제목을 '만세전'으로 바꾸어 다시 연재했다. 이 작품은 1948년 개작되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염상섭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에 하숙을 얻고 양주동과 지내며 새로운 문예사조를 연구하고 창작에 전념했다. 원고료에만 의지한 궁핍한 생활이었다. 1928년 귀국한 후 이듬해 조선일보에 들어가 학예부장을 맡았다. 1931년 1월부터는 조선일보에 한국 문학사에서 사실주의 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장편 '삼대'를 연재했다.
염상섭은 1931년 6월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작품활동만 하다가 1935년 매일신보에 입사해 정치부장으로 일했다. 1936년에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에서 발행되던 한국어 신문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만주로 건너갔다. 그러나 일본인 주간과의 마찰로 1939년 만선일보를 그만두고 국경 도시 안둥(현 단둥)의 한 건설회사에서 홍보담당관으로 일했다. 만주 체류 중에는 창작활동을 일체 중단했다. 1945년 안둥에서 해방을 맞고 귀국하여 1946년 경향신문이 창간되면서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중에는 해군에 입대하여 1951년 소령으로 임관했다. 서울 환도 뒤 1953년 해군본부 서울분실 정훈실장을 역임하고 해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초대학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예술원이 개원하며 종신회원에 추대됐다.
1952년 7월부터 1953년 2월까지 조선일보에 한국전쟁 중 서울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취우'를 연재했다. 1954년 '취우'로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1956년 '부부,' '짖지 않는 개'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1957년 예술원 공로상을, 1962년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까지 잇달아 수상했지만, 부상으로 받은 시계와 반지를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염상섭은 사상계에 '횡보 문단 회상기'를 연재하던 중 고혈압과 직장암으로 쓰러져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 18일 명동 천주교회에서 문단장이 치러졌고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됐다.
염상섭은 우리나라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이끌었다. 매서운 현실 통찰, 치밀한 구성, 적절하고 정확한 어휘 선택, 끈질긴 묘사로 사실주의 문학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반일감정을 펼쳐 보였다. 여기에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가 더해진다. 지식인들을 흔든 사회주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았고, 친일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당시 서울 중류층이 사용하던 다양한 생활어휘가 풍부하게 나타나 있어 국어 연구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그는 평생 장편 28편, 단편 150여 편, 평론 100여 편, 수필 30여 편을 남겼다. 대표작 '삼대'를 비롯해 '묘지(만세전),' '사랑과 죄,' '이심,' '무화과,' '백구,' '모란꽃 필 때,' '난류,' '취우,' '미망인,' '화관' 등의 장편과, '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 '제야,' '해바라기,'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고독,' '조그만 일,' '남충서,' '두 출발,' '삼팔선,' '임종,' '두 파산,' '일대의 유업,' '굴레,' '부부,' '짖지 않는 개,' '두 살림,' '세 설계' 등의 단편을 집필했다.
서울과 일본, 만주를 누비며 소설가로, 언론인으로 살았던 한평생.
그러나 집 한 채 남기지 못하고 말년에 생활고 속에서 병마에 시달렸다. 문단에서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기자가 셋방을 찾아가자 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면서도 호탕하게 웃으며 궁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기자를 꾸짖으며 "그런 일(취재차)로는 아예 오지 말고 그냥 좀 놀러들 와줘"하고 웃었다고 한다.
예술인들의 생활고는 염상섭이 사망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하다. 창작만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전업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부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겠다고 나섰으니 기대가 크다.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 예술인 복지금고 등 예술인 복지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프랑스의 엥테르미탕(예술인 실업급여제도) 같은 장치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예술인 복지 증진을 위해 조속히 정책이 수립되기를 바란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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