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수교 2년 전인 1990년 9월부터 인천과 정기 카페리 운항
인구 20만 어촌서 280만 한중 FTA 시범도시로 도약한 웨이하이
(웨이하이=연합뉴스) 신민재 기자 = 한중수교 25주년(8월 24일)을 일주일 앞둔 17일 오전.
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 국제여객터미널은 막 배에서 내린 수백명의 승객과 화물을 옮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장비들로 활기가 넘쳤다.
전날 저녁 인천항을 출발한 2만6천t급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2호는 14시간 서해를 가로질러 도착한 산둥반도 끝자락에 480명의 승객과 각종 원자재·수출품이 든 컨테이너 180개를 쏟아냈다.
'사드 갈등' 이후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발길이 끊겨 승객이 급감한 다른 한중 카페리 항로와 달리 중국 소상공인이 많이 타는 인천∼웨이하이 항로는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분위기다.
웨이하이시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의 항구도시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인구 20만명의 어촌이었던 이곳은 한국과 뱃길이 열린 뒤 인구 280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급성장하는 '기적'을 이뤘다.
2015년에는 중국 내 쟁쟁한 도시들을 제치고 인천과 함께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시범도시로 지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상전벽해'의 현장으로 꼽히는 웨이하이 변신의 물꼬를 튼 것은 한중 카페리였다.
한중수교 2년 전인 1990년 9월 15일 오후 5시 승객 130여명을 태운 카페리선 골든브릿지호가 인천항을 떠난 지 17시간 만에 웨이하이에 도착했다.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후 단절됐던 서해 뱃길이 41년 만에 다시 이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던 우리 정부는 1988년부터 공식적으로 '중공'이라는 옛 호칭을 '중국'으로 바꿨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중공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중국을 가려면 홍콩을 경유해서 가야 했는데 정식수교 전에 항공노선, 해상노선을 통틀어 최초의 여객 직항로가 인천∼웨이하이에 생긴 것이다.
항로 개설 당시부터 근무한 위동항운 김형진 상무(57)는 당시 상황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 정책에 따라 중국과도 교류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에 힘입어 한중 선사들이 카페리 항로 개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며 "첫 기항지로 거론된 산둥성의 웨이하이, 옌타이(烟台), 칭다오(靑島) 중에서 중국 측이 웨이하이를 밀어 인천∼웨이하이 항로가 최초로 개설됐다"고 설명했다.
양국의 해운업계가 50대 50 합작 투자로 설립한 위동항운의 회사 이름은 웨이하이와 그 동쪽을 연결한다는 의미이고, 배 이름 골든브릿지호는 한중간 우의와 교류를 다지는 '황금가교'의 역할을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1990년 9월 15일 인천에서 열린 골든브릿지호 취항식에는 당시 권력층의 최고 실세였던 김영삼 민자당 총재가 참석할 정도로 국내에선 큰 관심사였다.
끊긴 뱃길이 41년 만에 다시 열리자 시장의 반응도 뜨거웠다.
비용도 싸고 비자를 미리 받지 않아도 도착비자(선상비자)를 발급해 주니 승객이 몰렸다.
김 상무는 "초창기에는 배표를 구하기 어려워 한달씩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992년 인천∼톈진(天津) 항로를 비롯해 한중 카페리 항로가 추가로 개설됐고, 현재 인천항에서만 단둥(丹東)·옌타이·다롄(大連)·스다오(石島)·잉커우(營口)·칭다오·롄윈강(連雲港)·친황다오(秦皇島) 등 10개 항로가 열려 있다.
평택·군산에서도 중국을 오가는 6개 카페리 항로가 개설됐다.
지난해 16개 한중 카페리 항로를 이용한 승객은 152만4천명에 이른다.
인천∼웨이하이 카페리는 그동안 총 316만명의 승객과 98만개의 컨테이너를 날랐다.
웨이하이 외에도 한중 카페리가 취항하는 도시마다 부두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특수를 누리고 있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2015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비즈니스 서밋 축사에서 "25년 전 웨이하이에서 인천으로 오는 '황금가교'(골든브릿지)호의 기적소리를 시작으로, 한중간 새로운 우정의 항해가 시작됐다"고 연설해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양국간 인적·물적 왕래의 물꼬를 튼 위동항운 임직원들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리둥닝(李東寧·57) 위동항운 부사장은 "위동항운은 지난 27년간 한중 양국의 무역 왕래와 문화 교류를 촉진했고 특히 한국 경인지역과 중국 산동성의 경제 발전, 도시 개발, 산업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자평했다.
1992년부터 위동항운에 근무한 윤태정(56) 수석사무장은 "인천과 산둥반도를 오가는 카페리선을 3천회가량 타면서 지난 27년간 양국 모두 큰 이익을 거두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과 뱃길이 열리고 눈부신 성장을 이룬 웨이하이에는 한 때 한국 기업이 1천800개, 교민 수가 6만명에 달했지만 다른 중국 대부분 도시와 마찬가치로 인건비 상승과 규제 강화 등의 이유로 현재는 많이 철수한 상태다.
1996년부터 웨이하이에 공장을 운영 중인 김종유 웨이하이한인회 회장은 "중국에서 2008년 신노동법이 발효된 이후 인건비 상승으로 노동집약형 업종은 인건비가 싼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지로 이전해 현재는 700여개 기업과 1만8천여명의 교민이 있다"고 했다.
우리 기업과 교민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인 한러팡(韓樂坊)을 비롯한 웨이하이 시내 곳곳에서는 여전히 한글로 쓰인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거리의 상점에 진열된 한국 상품과 한국 연예인을 모델로 한 광고는 웨이하이가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도시'로 불렸던 이유를 실감케 했다.
김 회장은 "사드 갈등 초기에 웨이하이에서도 혐한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현지 당국이 심각한 사태로 번지는 것을 막아 지금은 특별한 갈등 없이 한국제품에 대한 소비와 비즈니스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G2(세계 주요 2개국)로 성장한 중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철저히 준비한다면 앞으로의 25년도 중국은 한국 기업들에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sm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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